오헨로란 무엇인가
순례자의 길, 오헨로

오헨로 — 1,200년의 길을 걷는다는 것
일본 시코쿠(四国) 섬에는 조금 특별한 길이 있다. 88개의 사찰을 차례로 돌며 걷는 순례길, ‘오헨로(お遍路)’다. 총 거리는 1,200킬로미터에서 길게는 1,400킬로미터. 걸어서 완주하려면 두 달 가까이 걸린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약 800킬로미터인 것을 감안하면, 오헨로가 얼마나 긴 여정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이 시코쿠를 찾고, 그중 상당수가 흰 옷을 입고 삿갓을 쓰고 나무 지팡이를 짚으며 섬 전체를 한 바퀴 돈다. 종교인도 있고, 은퇴한 노인도 있고, 무언가를 잃은 사람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걷고 싶어서 온 사람도 있다. 오헨로는 그런 길이다.

구카이라는 사람
오헨로를 이해하려면 한 인물을 먼저 알아야 한다. 구카이(空海, 774~835). 헤이안 시대의 승려로, 훗날 고보 다이시(弘法大師, 홍법대사)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이름 그대로 풀면 ‘하늘과 바다’라는 뜻이다.
구카이는 시코쿠 출신이다. 젊은 시절 수행을 위해 시코쿠 각지를 돌아다녔고, 이후 당나라 장안의 청룡사에서 밀교의 고승 혜과(惠果)를 만나 밀교의 핵심을 전수받았다. 805년의 일이다. 이듬해 귀국한 구카이는 일본에 진언종(真言宗)을 창시했다. 진언종은 밀교의 일파로,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중시해 지금도 본존불을 공개하지 않는 사찰이 많다.
구카이의 업적은 종교에만 머물지 않는다. 평민을 위한 일본 최초의 공립학교를 세웠고, 일본어 가나 문자를 창제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일본인들이 그를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닌 민족적 영웅으로 여기는 이유다. 835년 입적 후 천황으로부터 고보 다이시라는 시호를 받았고, 지금도 일본인들은 구카이보다 고보 다이시라는 이름으로 그를 더 많이 부른다.

순례길의 시작
오헨로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몇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구카이 대사가 42세 때 직접 88개 영장을 수행하며 개창했다는 설, 구카이가 입적한 후 제자 신제(真済)가 스승의 유적을 돌아다닌 데서 비롯됐다는 설 등이 있다. 역사 기록상 오헨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2세기 무렵이고, 지금처럼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방식이 굳어진 것은 16~17세기로 전해진다. 에도 시대 17세기 말부터 민간에 널리 퍼졌다.
흥미로운 전설도 하나 남아 있다. 에히메 현의 호족 에몬 사부로(衛門三郞)가 탁발을 온 구카이 대사를 박대했다가 나중에 죄를 뉘우치고, 대사에게 사죄하기 위해 순례를 떠났다는 이야기다. 오헨로의 기원을 설명하는 설 중 하나로, 참회와 속죄라는 순례의 정신적 의미를 잘 담고 있다.
88이라는 숫자
왜 하필 88개일까. 불교에서 인간이 가진 번뇌의 수가 108가지인데, 88은 그 변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 한자로 ‘米(쌀 미)’ 자를 풀면 팔십팔(八十八)이 되어, 88세를 미수(米壽)라 부르는 것처럼 풍요와 완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88개 사찰은 시코쿠의 네 개 현에 나뉘어 있고, 각 구역은 불교의 수행 단계를 상징한다. 도쿠시마(徳島)의 1번부터 23번은 ‘발심(発心)’, 깨달음을 향해 마음을 일으키는 단계다. 고치(高知)의 24번부터 39번은 ‘수행(修行)’, 에히메(愛媛)의 40번부터 65번은 ‘보리(菩提)’, 그리고 카가와(香川)의 66번부터 88번은 ‘열반(涅槃)’이다. 순례 자체가 하나의 깨달음을 향한 여정인 셈이다.

흰 옷과 지팡이의 의미
오헨로 순례자, 즉 오헨로상(お遍路さん)을 떠올리면 특유의 복장이 먼저 그려진다. 흰 장삼에 삿갓, 나무 지팡이. 이 셋이 기본이다.

흰 장삼은 사실 수의를 상징한다. 옛날에는 험한 산길을 걷다가 순례 도중 죽는 일도 적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수의를 입고 길을 나섰다는 뜻이다. 나무 지팡이는 구카이 대사 자신을 상징한다. 순례자들은 지팡이를 구카이 대사라 여기고, 숙소에서도 지팡이를 씻기고 먼저 쉬게 한다. 혼자 걷는 것 같지만, 늘 구카이 대사와 함께한다는 의미다. 이를 두고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고 한다.
각 사찰에서는 순례 책자인 노쿄초(納経帳)에 도장과 서명을 받는다. 88개 사찰을 모두 돌아 순례를 마치는 것을 결원(結願, 게치간)이라 하고, 이후 구카이 대사가 잠들어 있는 고야산(高野山)으로 참배를 가는 것이 관례다. 일본인들은 구카이 대사가 고야산에서 지금도 수행 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걷지 않아도 되는 순례
오헨로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버스, 자동차, 자전거를 이용해도 된다. 걷는 것 자체보다 구카이 대사의 흔적이 있는 88개 사찰을 방문하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순서도 자유롭다. 도쿠시마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을 준우치(順打ち)라 하고,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을 갸쿠우치(逆打ち)라 한다. 갸쿠우치는 영험이 세 배지만 힘들기도 세 배라는 말이 전해진다. 완주가 어렵다면 몇 년에 걸쳐 구역을 나눠 도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종교를 믿느냐도 상관없다. 오헨로의 중심에 불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배경을 가진 사람이든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종교적 목적이 아니라 자연을 걷고 싶어서, 또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조용히 걷고 싶어서 오는 사람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
오헨로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1,200년의 시간이 겹쳐 있고, 한 인물의 발자취가 깔려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참회와 바람이 배어 있는 길이다. 다음 편에서는 그 중심에 있는 구카이 대사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