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H님께

    회식을 먼저 마치고 바삐 돌아오는 내내 남은 말들이 입안을 맴돌았습니다. 제가 조금 더 건강했다면 혹은 술을 함께 마실 수 있다면, 마주 앉아 전했을 말들을 몇자 옮겨봅니다. 임단투가 조합원을 조직화하기 좋은 시간이라는 제 말에,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라고 되물었던 게 계속 마음에 남았어요.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누구나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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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윤스님께

    지난주 불교대학반 입학식에서 스님께서 경주로 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스님께서 기본반 강의에서 가르쳐 주신대로라면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불가의 자연스러운 인연일 텐데 막상 이제 봉녕사에서 스님을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많이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이 컸습니다. 매주 보내주시던 문자와 사진을 저는 몇 번씩 다시 읽어보곤 했습니다. 덕분에 별것 아닌 일에 불편해하던 마음을 가라앉혔고, 인생은 무엇인가 고민하며 남은 생을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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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두번째 삶의 시작이 되길

    S에게 첫 시집이 나왔다는 카톡 메시지에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마침내, 너의 목소리를 듣는구나. 회사와 일과 접대, 아내와 아이들 같은 삶의 무게를 견디며 짬을 내 조각조각 이어 붙였을 그 목소리. 그래, 내가 아는 S는 시인이지. 대견하다. 언젠가는 나올 줄 알았어. 어디 볼까? 월정사에서 우물을 찾는다라… 기대감에 소개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덜컥 마음이 내려 앉았다. 평론가인 누님의 발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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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에게

    지난 주 네가 전해준 의외의 소식은 주말 내내 나를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작년 언젠가 논현역 어디쯤을 나란히 걷던 기억. 동남아시아 IT 인력의 효율성과 조선일보에 나왔다던 서울 밤의 지나치게 밝은 조도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기억 말이야. 그리고 널 마중 나온 남편과 조카들. 특히 조카들의 밝은 표정과 눈빛에서 네가 얼마나 좋은 엄마일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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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에게

    Y야바람처럼 쉬이 네게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널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1년하고도 6개월 전이었으니까. 그즈음 나는 큰 수술을 받고 나서 매우 힘들었다.무려 세번째의 암수술.메스로 잘라낸 건 위장이었지만 더 많이 찢겨 나간건 마음인 것 같아.조만간 모든 게 끝날 지도 모른다는 막막함. 차라리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 싶은 절망감. 그런 감정의 밑바닥에서 내 장례식에 와서 한번쯤은 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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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들에게 받은 편지

    2023년 5월 8일 어버이날 저녁 언제쯤 편지 한통을 받았습니다. 많이 컸구나,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그런 생각이 들었고 뭐라도 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오랜만에 편지 올립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뜻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 하루하루 나름 즐겁게 살악고 있습니다. 행복하냐면,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럼 제가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혹시 지금 아버지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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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께

    아마 이 편지가 제가 아버지께 드리는 첫번째 편지인 것 같습니다. 맞지요? 살아 계실 때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도 잘 떠오르지 않으니 편지 같은 건 아마 국민학교 어버이날에 보낸 게 마지막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은 몇 주 전부터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이 아버지와 저의 나이가 같아지는 날이기 때문이에요. 돌아가시던 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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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께

    요새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엄마가 지금보다 훨씬 건강했을 한 십년 쯤 전에광양 매실 축제 가서 산책도 하고지난 제주도 여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갈치구이 같은 맛난 음식을 먹고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한라산에 온 식구가 도전해보고가까운 베트남에 훌쩍 다녀오거나 먼 유럽을 오랜 동안 여행해보거나그럴 껄 그랬다 싶은 아쉬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저도 어머니도 그런게 쉽지만은 않은 때가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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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에게

    우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제 당신 생각을 좀 했습니다. 새해 인사도 못했는데 문자라도 보내야지 했다가 이런 저런 감상이 길어져 편지를 쓰게됐습니다. ‘살아 있는 게 좋구나’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 없이 높은 하늘, 뺨을 간지르는 바람의 부드러움, 차마 올려다 볼 수 없는 눈부신 햇살, 계절의 변화에 철두철미한 나무와 나뭇잎, 꽁꽁 얼어버린 호수, 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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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누님께

    새벽 두시가 가까워졌습니다. 초복의 여름 밤, 습기 하나 없이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데 통 잠을 이룰 수가 없네요. 오후에 낮잠을 조금 자긴 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 진짜 이유는 젊은 날의 뜨겁고 빛나는 시절들이 머리 속에 돌아온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누나를 만나 이야기하면 떠오른 이십 몇 년 전의 과거가 지금의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어요. 스무살에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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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형님께

    S형 오늘은 다시 출근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회사를 다니는 것이 지금 저한테 꼭 필요한 일인지 확신이 서진 않지만, 아프기 전의 일상으로 복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막상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무엇인가가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액상의 물이 딱딱한 얼음이 되었다가 다시 녹아 물이되는 것과 비슷할텐데요, (만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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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들지 못하는 당신께

    매일 밤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해 결국은 방불을 켜고 침대에 양반다리로 앉고 마는 당신의 모습을 새벽마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배가 아파 화장실을 들락거릴 때도 있고, 음악을 듣다가 먼 과거로 빠져들기도 하고, 가끔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세어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당신의 불면증은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 지 확실하지 않은데 이렇게 회복하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