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님께
회식을 먼저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미처 다 못한 말들이 맴돌았습니다. 제가 조금 더 건강했다면, 아니 술이라도 함께 마실 수 있었다면 마주 앉아 전했을 말들입니다.
임단투가 조합원을 조직화하기 좋은 시간이라는 제 말에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라고 되물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는 당신이 겪는 고통을 누구나 통과해야 할 관문쯤으로 여기지 않아요. 아픔을 낭만으로 포장할 생각도 없고요.
다만 이것만은 말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투쟁이라고 부르는 이 싸움은 사실 회사와 노동조합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회사 뒤에는 법률이 있고, 경찰이 있고, 군대가 있고, 권력이 있고, 또 다른 거대한 자본들이 있습니다. 싸움판 자체가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었어요.
그러니 이 싸움은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싸울 때마다 크든 작든 상처가 생기고, 싸움이 길어질수록 더 큰 상처가 남고 곁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묻지만, 우리는 “누구와 함께 싸우는가”를 묻게 됩니다. 80년 5월 광주에는 80만 명의 시민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은 사람은 150명이었습니다. 슬픈 얘기가 아니라 싸움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겁니다.
함께 싸우고 함께 이겨나가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 싸움의 목표가 아닐까요? 그런 사람을 우리는 동지라고 부릅니다. 언젠가 우리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게 우리가 택한 길이 아닐까 합니다. 앞장서 싸우는 사람들의 길.

정호승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 아니라 /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는 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H가 바로 그런 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이 아마 첫번째의 싸움이었겠지만, 정말 잘 싸웠습니다. 근데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해요. 큰 바위는 작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제가 노동조합에서 일하게 된 계기를 말한 적이 있던가요? 몇 년 전 대의원 자격으로 5월 광주 전노대에 합류했을 때였습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제가 20년 동안 잊었던 가치를 위해 20년 동안 물러서지 않고 계속 싸우고 있었습니다. 황소처럼 우직하게. 무식한 사람이 산을 옮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도 느리지만 흔들리지 않게 역사를 딛고 서서 앞으로 나가겠구나.
H, 후배님도 이제 그 행렬에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루쉰은 “길은 만드는 사람 뒤에 생긴다”고 했고 백범은 “함부로 눈길을 가지 말라고,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갈 거라고” 했습니다. H가 걷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의미 있습니다.
P.S. 지치고 힘들 때면 잠시 멈춰 서도 괜찮습니다. 큰 바위도 오랜 시간을 견뎌야 단단해 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