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누님께

S누님께

새벽 두시가 가까워졌습니다.

초복의 여름 밤, 습기 하나 없이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데 통 잠을 이룰 수가 없네요.

오후에 낮잠을 조금 자긴 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 진짜 이유는 젊은 날의 뜨겁고 빛나는 시절들이 머리 속에 돌아온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누나를 만나 이야기하면 떠오른 이십 몇 년 전의 과거가 지금의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어요.

스무살에 바라 보았던 풍경과 만난 사람들, 그들의 말과 습관, 함께 한 웃음 소리들이 순번을 바꿔가며 계속 떠오릅니다. 잊으려 한 적 없지만 절로 잊혀진 기억에서는 어색한 낯익음과 온기가 느껴졌고 그리 오래 됐는데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찬란함이었습니다.

최루탄 쏟아지는 진입로에서 보도블럭을 깨고 화염병을 던지며 대치하던 풍경, 국가 보안법, 막걸리 몇통을 앞에 두고 끝없이 주고 받던 이야기들, 담배 연기, 술은 절대 남기지 않던 습관, 교수님의 끝없는 책 이야기를 들으며 깜빡 깜빡 졸던 카페 초대의 구석진 테이블, 외상을 긋고 어깨 동무를 하고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르던 골목, 해마다 봄이면 운동장 옆으로 줄지어 선 나무들이 피우던 꽃이 벚꽃이 아니라 살구꽃이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S누님께
과꽃

그래요.

그렇게 푸르고 푸른 봄을 함께 보냈었는데 어찌 그리 긴 세월을 잊고 지냈을까 저는 후회가 많습니다. 진작에 인생에 대해 진중했다면 아마 그 청춘의 시간을 더 깊고 향기나게 만들어 지금보다 훨씬 멋진 인생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회만큼 어리석고 의미없는 일도 없다는 것도 이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나약한 후회 대신에 남은 인생을 더 근사하게 만들기 위해 기대하고 노력하는 일, 그게 더 재미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식사 때도 이야기했지만) 스물 몇살이었던 사람들이 오늘 갑자기 시간을 건너 뛰어 오십 몇이 되어 스스슥하고 나타나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건너 뛴 시간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스물 몇 살 때도 그랬지만) 우리는 삶에 대한 태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아주 큰 공감대가 있기 떄문이겠죠.

다소 늦었지만, 그리고 아픈 끝에 깨닫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제 주변에는 많고 또 저를 걱정해 주고 있었습니다. 매우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지요. 인생은 그 사람들과 또 그런 기억의 축적과 거의 같으니까요.

고요하고 깊은 물처럼, 여전히 한결같은 누나 모습은 제게도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2022.07.17

Similar Posts

  • 턱 수염이 없는 자화상 – 반 고흐

    제가 건강해져서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그림은 아마 제 대표작이 될 거에요. -빈센트 반 고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흐는 죽기 1년 전인 1889년 ~ 1890년 사이 정신 병원에 입원해있었지만, 그 기간 약 150점의 유화를 그렸고 많은 대표작들이 탄생했다.이 작품은 1889년 일흔번째 생일을 맞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는데 199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화로 750억원에 팔렸다.그림에…

  • |

    첫 시집, 두번째 삶의 시작이 되길

    S에게 첫 시집이 나왔다는 카톡 메시지에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마침내, 너의 목소리를 듣는구나. 회사와 일과 접대, 아내와 아이들 같은 삶의 무게를 견디며 짬을 내 조각조각 이어 붙였을 그 목소리. 그래, 내가 아는 S는 시인이지. 대견하다. 언젠가는 나올 줄 알았어. 어디 볼까? 월정사에서 우물을 찾는다라… 기대감에 소개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덜컥 마음이 내려 앉았다. 평론가인 누님의 발문에…

  • |

    잠들지 못하는 당신께

    매일 밤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해 결국은 방불을 켜고 침대에 양반다리로 앉고 마는 당신의 모습을 새벽마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배가 아파 화장실을 들락거릴 때도 있고, 음악을 듣다가 먼 과거로 빠져들기도 하고, 가끔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세어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당신의 불면증은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 지 확실하지 않은데 이렇게 회복하지 못한…

  • |

    H형

    사촌동생의 돌잔치에 갔다가 오랜만에 H형을 만났다. H형과 나도 사촌 지간이지만, 내가 H형에게 갖고 있는 친밀감은 웬만한 형제 못지 않을 것 같다. H형은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내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자전거의 펑크를 수리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참나무에서 장수벌레를 꺼내는 것도 알려주었지만 형은 내가 잠든 사이 그 장수벌레들을 몰래 풀어주곤…

  • |

    J에게

    지난 주 네가 전해준 의외의 소식은 주말 내내 나를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작년 언젠가 논현역 어디쯤을 나란히 걷던 기억. 동남아시아 IT 인력의 효율성과 조선일보에 나왔다던 서울 밤의 지나치게 밝은 조도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기억 말이야. 그리고 널 마중 나온 남편과 조카들. 특히 조카들의 밝은 표정과 눈빛에서 네가 얼마나 좋은 엄마일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단다….

  • |

    Y에게

    Y야바람처럼 쉬이 네게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널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1년하고도 6개월 전이었으니까. 그즈음 나는 큰 수술을 받고 나서 매우 힘들었다.무려 세번째의 암수술.메스로 잘라낸 건 위장이었지만 더 많이 찢겨 나간건 마음인 것 같아.조만간 모든 게 끝날 지도 모른다는 막막함. 차라리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 싶은 절망감. 그런 감정의 밑바닥에서 내 장례식에 와서 한번쯤은 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