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에게

y에게

우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제 당신 생각을 좀 했습니다. 새해 인사도 못했는데 문자라도 보내야지 했다가 이런 저런 감상이 길어져 편지를 쓰게됐습니다.

‘살아 있는 게 좋구나’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 없이 높은 하늘, 뺨을 간지르는 바람의 부드러움, 차마 올려다 볼 수 없는 눈부신 햇살, 계절의 변화에 철두철미한 나무와 나뭇잎, 꽁꽁 얼어버린 호수, 길고 긴 아스팔드와 아파트 같은 것들, 언젠가 강남 찻집에서 보낸 3~4시간 같은 것들.

‘좋아’라며 미소로 넘어갈 일상의 이런 풍경들에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수술 후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사전적인 정의는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는 야속함은 화남이나 성냄, 미움과는 좀 다릅니다.

뭐랄까, 좋긴 하지만 그리고 날 돌아봐 주기도 하지만 내가 없어도 크게 변하지 않을 그런 절대적인 영속성에 대한 아쉬움인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하늘과 바람과 햇살과 나뭇잎은 변함 없이 좋음을 전해주었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랬어요. 마찬가지로 내가 죽어도 그것들은 여전히 푸르고 높고 뜨겁고 예쁘겠지요. 그리고 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없어도 잘 지낸 나처럼, 내 주위의 사람들도 잘 지낼 거에요.

그런 변함 없음에 대해 매정함과 막막함이 섞인 투정 같은.

해가 바뀌어 2023년이 되었지만 제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바뀌지 않는게 당연한 나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불만스럽습니다. 어제가 2023년 첫번째 출근길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떻게 회사를 그만두지’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그런 생각의 끝에 일찌감치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당신이 생각났지요.

행복하십니까?

y에게

마이클 샐던의 책에 보면 ‘행복이란 개념은 워낙 광범위해서 사회복지 같은 비경제적 부문도 포함하지만, 대개는 부유한 삶과 동일시된다‘라는 표현이 있어요. 물론 이건 시장의 자유에 대한 논의에 나온 것이라 맥락이 좀 다르긴 한데, 조금 다르게 바꿔도 크게 들리지 않다고 느껴지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으로요.

행복은 자아의 실현과 사회에 대한 봉사, 보다 지속가능한 미래와 다음 세대를 위한 헌신 같은 것도 포함하지만, 대개는 부유한 삶과 동일시 된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가장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내 시간을 팔아서 누리는 이 느슨한 안락함이 저는 매우 불만스럽습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피를 팔아서 생계를 꾸려가는 느낌입니다. 이런 마음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한 건물에 같이 있었을 때 좀 더 자주 보고 이야기하고 밥 먹고 술 마실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먹고 자는 생물학적 비중이 높을 수록 인생은 재미없어지는걸 좀 늦게 알았어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누는 사회적 교감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도취감 같은 비생물학적 감정이 무료함과 절망을 지탱해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여튼, 한파가 끝나고 나면 어디라도 잠시 다녀옵시다. 당신이 자주 오르는 관악산도 괜찮고 모처럼 근사한 영화나 전시회를 보러가는 것도 이색적이겠네요.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좋은 벗으로 남아주어 고맙습니다.

2023.01.02

Similar Posts

  • |

    둘째 아들, 태어나다

    둘째 아들은 12월 17일 오후 4시 7분에 태어났다.첫째 아들한테는 미리미리 편지도 쓰고 태어나고 나서는 감격에 겨운 포스트도 올리고 했는데 둘째는 어떻게 하다보니 출생 기념 포스트도 일주일이 지나서야 쓰게 되었다.기쁘고 반가운 것은 똑같은데 아들이 태어난 것이 조금은 익숙해진 탓에 그 설레임은 첫째 아들만 못한 것은 사실이다.둘째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자유롭게, 특히 영혼이 늘 평온할…

  • |

    아들의 두번째 생일에 아빠가 보내는 편지

    나의 아들 예준아. 1년 전의 오늘에는 겨우 걸어다니기 바빴던 네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온 집안을 쿵쿵 거리며 뛰어다니고 있구나. 덕분에 아래 층 아줌마가 소음 문제로 종종 우리를 못살게 군단다.그러나 이 아빠는 네가 그렇게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기만 하구나. 그 흔한 감기 한번, 잔병치레 한번 없이 무럭무럭 커서 아빠, 엄마 그리고 너의 외할머니까지 무척 감사하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너는 태어나 4개월째 되던 날부터 1년하고도…

  • |

    생일 축하 편지 2통

    생일을 축하하는 편지를 2통 받아 옮겨 둔다 김예준 아빠에게 생일 축하 드려요 아빠. 1년 동안 저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함께 재미있는 시간 많이 보내고 싶어요. 선물은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오면 그 때 드릴께요. 몰겜한 건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C방 더 자주 데려가 주세요. 파스타 많이 해주세요. 앞으로 오래오래 장수하세요. 예준 올림…

  • 턱 수염이 없는 자화상 – 반 고흐

    제가 건강해져서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그림은 아마 제 대표작이 될 거에요. -빈센트 반 고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흐는 죽기 1년 전인 1889년 ~ 1890년 사이 정신 병원에 입원해있었지만, 그 기간 약 150점의 유화를 그렸고 많은 대표작들이 탄생했다.이 작품은 1889년 일흔번째 생일을 맞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는데 199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화로 750억원에 팔렸다.그림에…

  • |

    잠들지 못하는 당신께

    매일 밤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해 결국은 방불을 켜고 침대에 양반다리로 앉고 마는 당신의 모습을 새벽마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배가 아파 화장실을 들락거릴 때도 있고, 음악을 듣다가 먼 과거로 빠져들기도 하고, 가끔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세어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당신의 불면증은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 지 확실하지 않은데 이렇게 회복하지 못한…

  • |

    첫 시집, 두번째 삶의 시작이 되길

    S에게 첫 시집이 나왔다는 카톡 메시지에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마침내, 너의 목소리를 듣는구나. 회사와 일과 접대, 아내와 아이들 같은 삶의 무게를 견디며 짬을 내 조각조각 이어 붙였을 그 목소리. 그래, 내가 아는 S는 시인이지. 대견하다. 언젠가는 나올 줄 알았어. 어디 볼까? 월정사에서 우물을 찾는다라… 기대감에 소개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덜컥 마음이 내려 앉았다. 평론가인 누님의 발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