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형님께
|

S형님께

S형

오늘은 다시 출근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회사를 다니는 것이 지금 저한테 꼭 필요한 일인지 확신이 서진 않지만, 아프기 전의 일상으로 복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막상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무엇인가가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액상의 물이 딱딱한 얼음이 되었다가 다시 녹아 물이되는 것과 비슷할텐데요,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크게 변화할 기회를 모처럼 (무려 세번이나) 주었는데도 다 걷어차고 계속 이전의 변변치 않고 의미 없는 일상으로 꾸역꾸역 돌아가는 미련한 인간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뭐, 시지프스의 돌 굴리기 같은 것이라면 기회가 아니라 형벌이겠지만요.

S형님께

어쨌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어지럼증에 툭하면 주저앉던 연말의 상태에 비하면 적어도 지금이 훨씬 건강해진 것은 틀림없습니다. 몸무게가 15kg이 빠졌는데 인바디로 체크해보니 체지방률이 표준 이하가 되었더라고요.

아침 출근길에 그야말로 생명력이 흘러 넘치는 진초록의 나뭇잎들이 햇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나는 것을 보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 갔습니다. 요즘은 걷는 게 좋아요. 땅을 천천히 꾹꾹 눌러 밟고 다니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게 햇살과 나뭇잎과 대지를 느끼며 걷다보니 이상하게 형 생각이 났습니다.

태고의 생존 본능이 아직도 우리 몸에 아드레날린으로 남아있는 것처럼,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준 형의 어떤 모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사에 도착하면 편지 한통 써야겠다 싶었어요.

작년 11월 수술 받고 사실은 회복이 매우 더뎌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아프고 힘들고 한발 앞으로 나간 것 같다가도 다시 두발 뒤로 물러서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무엇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었고요.

그러다가 지난 3월부터 눈에 띄게 많이 회복됐습니다. 중고 자전거를 하나 구입해서 용인 근처 이곳 저곳 다니기도 하고 한번은 용기를 내서 한강까지 다녀왔어요. 아침먹고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긴 했지만요. 형이 있는 남쪽 어딘가에도 놀러가고 싶었는데 그건 아직 여의치 않네요.

세번째의 기회(인지 시련인지)를 받고 보니 이제 제게 남은 시간 모두가 덤이라는 생각에 상황에는 모순적이지만 기쁘기도 해요. 왜냐하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 지 잘 알겠거든요.

인생은, 태어날 때 받은 큰 병에 기억과 사람을 채워넣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제는 단언할 수 있을만큼 알겠습니다.

먼저 가는 사람은 기억을 남겨주고 그 기억을 받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과 자기의 빈 병을 채워 넣겠지요. 그게 인류가 살아가는 방법이고 살아남은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위가 없으니 불편한게 많은데 가끔 술 생각이 나는 것도 그중 하나에요. 신촌 산타페에서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밤새 술을 마시던 밤들이 몇년 전 같고 언젠가 거제 밤바다에서 자갈이 굴러가는 소리를 듣던 것도 몇달 안된 것 같습니다. 그날 그 바다에서 소주를 마셨던지 안 마셨던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기분 좋게 마셨길 바래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 다니기도 했습니다. 20년 동안 만나지 못한 어떤 선배는 머리가 하얗게 센 교수가 되어있었고 10년 동안 만나지 못한 어떤 친구는 대기업의 임원이 되어있었어요. 다들 각자의 길을 잘 가고 있었구나, 안도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더 자주 볼 걸 하는 아쉬움과 죄책감도 생겼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마 몰랐을 거에요. 작년에 제가 작성한 어떤 리스트에 자기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 더 늦기 전에 살아 있을 때 보려고 애썼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는 좀더 자주 보게될 거라는 것들요.

형님도 한번 봅시다. 서울이든 부천이든 올라 오게 되면 연락 주세요.

늘 건강하시고, 유리알처럼 빛나는 연녹의 감성도 잃지 마시고.

2022년 6월

Similar Posts

  • 근황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찬 바람이 느껴지면 물처럼 맑은 콧물이 줄줄 흘러 내리는 비염이 난리 칩니다. 지난 여름 오버핏 티셔츠와 배기바지로 비쩍 말라버린 몸매를 감춘 것처럼 겨울에 입을 빅사이즈 티셔츠 몇 장과 면바지 몇 장을 샀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있습니다. 뭐, 그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로 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한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일이…

  • |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

    큰 아들을 위한 첫번째 편지큰 아들을 위한 두번째 편지둘째 아들을 위한 첫번째 편지 2009년 11월의 어느 날이다. 아빠가 좋아하는 남자가 몇명 있는데, 그 중 한사람의 이야기를 해볼께.사르트르가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고 칭했던, 그 사람의 이름은 체 게바라.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아주 뛰어나거나 너무 이상적이거나 한 사람이야. 2009년 지금처럼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꿈과 이상, 심지어 행복까지도 돈으로…

  • 입원 준비물

    암 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일주일 길게는 몇달까지 입원을 해야 합니다. 집에서 사용하던 일용품을 모두 가져갈 수는 없지만 입원하는 첫날부터 필요한 물품들도 있어 미리 준비하면 집을 왔다갔다 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습니다. 수술을 하고 나면 사실 환자는 세수를 할 여력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만, 보호자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세수는 물론 머리도 감고 때에 따라 기본적인 화장도…

  • |

    죽은 사람은 외로워. 황인숙

    ― 나 아무래도 안 좋은가 봐.    꿈도 이상한 꿈만 계속 꾸고    어제는 생전 안 나타나던 길순이가    명림이랑 같이 집에 온 거야. 깜짝 놀라서    “길순아, 너 죽었잖아?!” 그랬다?     조직 검사 결과를 며칠 앞둔 언니가    겁먹은 목소리로 전화했다. ― 동네 의사가 괜찮을 거라 했다며?    마음 편히 가져.    너무…

  • |

    J에게

    지난 주 네가 전해준 의외의 소식은 주말 내내 나를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작년 언젠가 논현역 어디쯤을 나란히 걷던 기억. 동남아시아 IT 인력의 효율성과 조선일보에 나왔다던 서울 밤의 지나치게 밝은 조도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기억 말이야. 그리고 널 마중 나온 남편과 조카들. 특히 조카들의 밝은 표정과 눈빛에서 네가 얼마나 좋은 엄마일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단다….

  • 모처럼의 새벽

    아마도 ‘하아’ 소리를 낸 것 같습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는데 안도인지 놀람인지 모를 큰 숨에 잠이 깼습니다. 5시가 조금 안된 시간, 여명이라기엔 날이 이미 매우 밝습니다. 자전거를 탈까 싶었지만 가뜩이나 칼로리가 부족한 상황이라 공복 유산소는 아무래도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머리 맡의 스마트폰을 켜고 스포티파이에서 early morning을 검색합니다. 시끄럽지 않을만한 플레이 리스트를 골라 음악으로 방을 채우고 침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