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의 새벽

모처럼의 새벽

아마도 ‘하아’ 소리를 낸 것 같습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는데 안도인지 놀람인지 모를 큰 숨에 잠이 깼습니다. 5시가 조금 안된 시간, 여명이라기엔 날이 이미 매우 밝습니다.

자전거를 탈까 싶었지만 가뜩이나 칼로리가 부족한 상황이라 공복 유산소는 아무래도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머리 맡의 스마트폰을 켜고 스포티파이에서 early morning을 검색합니다. 시끄럽지 않을만한 플레이 리스트를 골라 음악으로 방을 채우고 침대에 등을 기대 창 밖을 내다 봅니다.

시간이 점차 느려지는 것을 느끼면서 머리 속을 비웁니다. 복잡하고 어지럽고 성난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이미 밝은 줄 알았던 세상이 조금씩 더 밝아지고 있었습니다. 쓰레기 수거차의 엔진 소리, 인부들의 외침, 경비 아저씨들의 알 수 없는 대화가 들립니다. 사람들의 하루는 생각보다 훨씬 일찍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복직하고 한 주가 지났고 그저 공백 기간의 일을 살펴봤을 뿐인데도 역시나 좀 피곤했습니다. 마음 달랠 것을 찾다가 명심보감까지 이르렀는데 예나 지금이나 마음에 와닿는 문구들이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역시 사람의 마음.

諷諫에 云 水底魚天邊雁은 高可射兮低可釣이어니와 惟有人心咫尺間에 咫尺人心不可料니라.

물 속 깊은 고기는 낚아낼 수 있고 하늘 높은 기러기는 쏘아 잡을 수 있지만 오직 사람의 마음은 가까이에 있어도 살필 수가 없다.

畵虎畵皮難畵骨이요, 知人知面不知心이니라.

호랑이의 가죽은 그릴 수 있지만 뼈는 그리기 어렵고, 사람의 얼굴은 알아도 마음은 알기 어렵다.

對面共話하되 心隔千山이니라. 海枯면 終見底나 人死에 不知心이니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지만 마음은 천개의 산만큼 떨어져 있다. 바다가 마르면 바닥을 볼 수 있지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마음을 알 수 없다.

인생이란 게 기억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는데, 사는 게 쉽지 않은 이유는 사람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두번째는 시간(의 농도)에 대한 차이.

일이 어렵거나 복잡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죽음의 상대적 거리가 다른 탓에 서로가 인식하는 세계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회사 일일지라도, 혹은 회사 일이니 더욱) 각자 시간이 아깝지 않게 의미있는 결과를 끌어내야 할텐데, 그저 (아주 낮은 수준의) 적당한 타협으로 마무리되는 것에 대한 이질감, 그리고 거부감이었습니다.

어찌보면 그들이 더 일반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회사에 최소한의 성과를 보장하는 이런 저런 프로세스와 규정들이 생겨나는 것이고요. 저도 그들의 하나였었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사 뿐만 아니라) 일상을 인생을 그렇게 보내고 있기도 합니다. 저 역시 시간이 더 흐르면 다시 그들의 하나가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자신하겠습니까. (솔직히 지금은 자신하는 쪽에 가깝지만)


음악을 듣고 책을 뒤적이고 창 밖의 소음에 집중하고 노트북의 키보드를 몇번 두드리고 나니 어느새 두시간이 흘렀습니다. 맞은 편 방문이 열리고 큰 아들은 학교갈 준비를, 아내는 학교 보낼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평온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새삼 고맙습니다. TGIF!

모처럼의 새벽

Similar Posts

  • |

    여름 밤

    온기가 남아있지만 끈적이지 않는다. 시원하거나 차가운 느낌도 없지만, 살갗에 닿는 바람의 온도가 조금 낮아진 것만으로도 가을 생각은 자연스럽다.또 하나의 계절이 이렇게 반복되고 있다. 둘째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치열한건지 비열한 건지 알 수 없는 내 삶에 넌덜머리가 나기 시작했다.사이드 미러 뒤로, 한 쪽 헤드라이트가 나간 트럭 한대가 엉금엉금 따라오는 모습이 기괴하다. 관련된 글: 아우라와 현혹 재활…

  • semi nightmare

    식은 땀이 나면서 눈이 확 떠지는 그런 악몽은 아니지만, 다양한 종류의 어둡고 답답한 꿈을 거의 매일 꾼다. 가도 가도 내가원하는 길이 나오지 않는다거나, 사방이 뺵빽한 나무로 가득한 숲 한가운데 툭 떨어진다거나, 책 5권을 사야 하는데 2권이 보이지 않아 하루 종일 서점을 헤메인다거나 (물론 종업원들에게 물어 봤지만 대답을 받지 못했다) 하는 꿈이다. 이런 류의 꿈을 뭐라…

  • 배부른 사자처럼

    요즘 산책을 할 때는 음악 대신 오디오북을 듣는다. 명상에 관한 책이다. 쿤달리니, 차크라, 경혈, 우주, 햇빛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중 그래도 선명하게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는 문장이 있었다. 배부른 사자처럼 느긋하게 숨 쉬세요. 미래를 걱정하는 생물은 사람 밖에 없다고 한다. 동물들은 그저 지금, 지금 살아 남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그러니 배부른 사자는 얼마나 느긋하겠는가….

  • 소설. 5/100 아담도 이브도 없는. 아멜리 노통브

    아담도 이브도 없는 –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문학세계사 이 책을 두권이나 샀다. 이미 읽으려고 사 놓았는데, 없는 줄 알고 또 산.전작주의는 호기심에서 출발하지만 나중엔 집착이나 의무 같은 게 되기도 하는데 그래서 아멜리 노통이 약간 지겨워지려고 한다. 이 책은 그녀의 첫사랑에 관한 담담한 진술이지만 웬지 모두가 사실일 것 같지는 않다. 특히 ‘린리’는 애초부터 가공의 인물이…

  • 游泳

    우주에 대한 신기한 사실을 이것 저것 알게 되면서 막연히 공포스러운 상상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무한히 우주를 떠다니는 어떤 장면이었습니다. 우주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속 1m의 속도로 모선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모선에 가까이 다가가려 바둥거려보지만 공기 저항이 없는 우주에서는 천천히 계속 멀어질 뿐입니다. 마침내 모선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면 그는 캄캄한 우주를 끝도 없이 밀려날…

  • 네번째 정기 검사 결과는 좋았습니다

    2021년 11월 8일 수술을 받고 6개월에 한번씩 추적 검사를 받고 있습니다. 만으로 2년하고 한달이 지났고, 4번째의 정기 검사 결과는 다행히도 깨끗하게 나왔습니다. 암 환자들로 가득찬 암센터에 들어 가는 것으로도 마음이 무겁고 기분이 가라앉습니다. 차분해지는 것도 같고 우울해지는 것도 같고 다시 삶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도 같았습니다. 바코드를 읽혀서 도착을 체크하고 신장과 체중, 혈압을 측정하는 번호표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