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웃는 남자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이해한다는 말은 복잡한 맥락을 무시한 채 편리하고도 단순하게 그것을, 혹은 너를 바라보고 있다는 무신경한 자백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나 역시 남들처럼 습관적으로 아니면 다른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그 말을 할 때가 있었고 그러고 나면 낭패해 고개를 숙이곤 했다. – 웃는 남자. 황정은

  • 시. 속수무책 – 김경후

    속수무책 김경후 내 인생 단 한 권의 책속수무책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척하고 내밀어 펼쳐줄 책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진흙참호 속묵주로 목을 맨소년병사의 기도문만 적혀있어도단 한 권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찌그러진 양철시계엔바늘 대신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독서중입니다, 속수무책 유쾌하다. 읽고 나서 나는 씨익하고 웃어버렸다.“어쩌라고?”나는 속수무책이지만,…

  • 시. 패배는 나의 힘 – 황규관

    어제는 내가 졌다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오늘도 나는 졌다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적은 내게 모두를 댓가로 요구했지만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善)이라고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거기서 끝까지 싸워야눈빛이…

  • 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이병률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 이병률 빈집으로 들어갈 구실은 없고 바람은 차가워 여관에 갔다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그 늦은 시각 여관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옆방에 머물고 있는 사내라고 했다정말 미안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왜 그러느냐 물었다말이 하고 싶어서요 뭘 기다리느라 혼자 열흘 남짓 여관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쓸쓸하고 적적하다고뭐가 뭔지 몰라서도 아니고…

  • 2017년 여름 휴가

    올 여름 휴가는 3일 아이들과 여주에 다녀오는 것으로 짧게 마무리했다. 일정과 결산 (모두 계산해보니 73.7 들어갔다. 3명이서 3일간 꽤 많이 썼네) 8/16 주유 : 5.0 물안경과 과자, 물 : 2.0 ㄴ 물안경이 어디로 갔는지, 2개 밖에 없어서 하나를 새로 구입해야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워터파크에서 물안경이 필수품은 아니었다. 여주 썬밸리 호텔 객실 + 워터파크 2인 :…

  • 돈까스 클럽

    방학을 맞아 할머니댁에 일주일간 놀러 가기로 했다. 사실은 우리 동네가 더 시골. 할머니가 훨씬 더 잘 챙겨줄 것을 알고 있지만, 일주일동안 집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웬지 애틋한 마음이 들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사 주기로 했다. 언제 이렇게 자랐나. 그리도 또 언제 이런 시간이 올까. 한참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나만큼 나이를 먹으면, 이런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알아줄까….

  • 상 喪

    문자를 받은 건 어제 아침이었다. [부고] 옥세*(장인) 오진*(부친) 오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장례식장 : 인**대병원 장례식장 5호실 발인 : 27일 (화) 예전엔 상가에 가면 죽음에 대한 이런 저런 소회가 있었는데, 이젠 조금 낯선 일상처럼 어색하지 않다. 생전 처음 보는 고인의 얼굴, 그러나 그 사진 뒤에 숨어있는 그의 온전하고 긴 시간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존경하는 절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 턱 수염이 없는 자화상 – 반 고흐

    제가 건강해져서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그림은 아마 제 대표작이 될 거에요. -빈센트 반 고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흐는 죽기 1년 전인 1889년 ~ 1890년 사이 정신 병원에 입원해있었지만, 그 기간 약 150점의 유화를 그렸고 많은 대표작들이 탄생했다.이 작품은 1889년 일흔번째 생일을 맞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는데 199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화로 750억원에 팔렸다.그림에…

  • 작문. 꿈

    초겨울인듯 두툼한 외투를 입고 서너명이 무리를 지어 어디론가 한참 걸어가고 있었다. 뒤쪽에 몇명의 일행이 더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앞에 덩치 큰 남자가 휘파람을 불며 휘적휘적 우리를 이끌었는데 그는 쪼리 슬리퍼를 신은 채였다. 내 옆에 나란히 걷던 금발의 여자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였지만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는 하얀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러브스토리에서 이런 모자를 쓴 장면이 있었던가.  그녀는…

  • 산문. 아무것도 없는 방에 살고 싶다

    가구, 옷, 식기 등 소유물을 극단적으로 줄이면서 정말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미니멀리스트’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단샤리’라고도 하고요. 소유물이 그 사람의 삶을 대신하지 않고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는 게 효율적이라는 데 크게 동감하며 읽고 있는 책입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물건을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남기고서 홀가분하게 사는 라이프 스타일 제게 심플한 생활이란 물건을 전부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