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이병률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 이병률

빈집으로 들어갈 구실은 없고 바람은 차가워 여관에 갔다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
그 늦은 시각 여관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옆방에 머물고 있는 사내라고 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왜 그러느냐 물었다
말이 하고 싶어서요 뭘 기다리느라 혼자 열흘 남짓 여관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쓸쓸하고 적적하다고
뭐가 뭔지 몰라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닌데 사내의 방에 가지 않았다
간다 하고 가지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기는 마찬가지,
그가 뭘 기다리는지 들어버려서 내가 무얼 기다리는지 말해버리면
바깥에서 뒹굴고 있을 나뭇잎들조차 구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셔츠 끝단을 타고 떨어지는 물소리를 다 듣고 겨우 누웠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
온다 하고 오지 않는 것들이 보낸 환청이라 생각하였지만
끌어다 덮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였다


누군가의 지루한 발표.

무심코 연 전화기에서 저런 시가 튀어나왔다.
두번을 더 찬찬히 읽어 내려가며 나는 한없이 가라앉았다.

외롭고 쓸쓸하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 같이 우울하고 또 우울한 문장들 사이에 사람을 진정시키는 손길이 숨어 있었다.

시인은 사람들이 애써 뒤집어 쓰고 있는 위선의 옷을 발가 벗겨 놓고 외로움에 쭈삣거리는 그들을 향해 깔깔거리는 어이없지만 악의 없는 족속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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