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슬픈 빙하시대

당신을 알았고, 먼지처럼 들이 마셨고
산 색깔이 변했습니다. 기적입니다. 하지만 나는 산속에 없었기에 내게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이 손짓해도, 목이 쉬게 외쳐도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가는 길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닦아 놓았을 그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덤불로 가리워진 그 어디쯤, 길도 아닌 저 끝에서 당신은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요. 다시는 기다리지도 부르지도 않겠지요. 그 산을 다 덮은 덤불이 당신의 슬픔이겠지요.
호명되지 않는 자의 슬픔을 아시는지요. 대답하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아시는지요. 늘 그랬습니다. 이젠 투신하지 못한 자의 고통이 제 몫입니다.
내게 세상은 빙하시대입니다.

허연.

빙하시대라는 단어가 전해주는 차가운 환기.

‘그 산을 다 덮은 덤불’ 등의 표현은 슬픔, 비애, 고통으로 이어지는 서사적 흐름이다

Similar Posts

  • 산문. 6/100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열린책들 지난 달 다녀온 도서박람회에서 싸게 얻어온 책 중의 하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는 정말이지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그 후속작인 신/나무/뇌/타나토스 등에는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이 책은 지식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그것을 왜곡하지 않고 재해석하거나 더 큰 의미를…

  • |

    만화. 맛있는 관계. 사토루 모키무라

    제목이 좀 야릇한가?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야한 사람.🙂 요리만화다.Satoru Makimura의 요리만화.유복한 가정에서맛있는 음식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아빠와행복한 엄마.어느날 아빠는 죽고, 엄마는 외갓댁으로.졸지에 생고아가 된, 맛은 알지만 요리는 모르는 젊은 처자의 사랑과 음식이야기. 관련된 글: 만화. 피바다 학생작품집 1 Akiko Hatsu – 꿈 그리고 환상 26/100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 만화. 분노의 늑대 김행숙, 진은영, 이성복, 니코스…

  • 소설. 5/100 심플플랜 (스콧 스미스)

    심플 플랜 –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비채 지금도 그렇겠지만,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그것이 이야기가 될 법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짤막하게 줄여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반응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심플플랜은 그런 면에서 합격이다. 이야기를 간단히 줄이면 “어느 겨울,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추락한 경비행기를 발견한다. 나와 형, 형친구, 세 남자는 그곳에서 우연히 400만불을 손에 넣는다. 여름이 될 때까지…

  • 헤어질 결심 (10/10)

    (마침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롤랑 바르트류의) ‘해석의 무한성’에 관심이 있다면 모든 씬과 대사에서 숨은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재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저는 도입부에서 한동안 화면 자체가 매우 불편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지루하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정통적인 영화 문법에서 사용하지 않는 앵글과 구도 때문이었습니다. 마주보고 대사를 주고 받는 장면에서 화자와 청자의 위치가 거울을 통해 왜곡돼 기준없이…

  • 9/100 세계의 문학 2005년 겨울호

    내게 있어 이 책은 10년이 넘게 정기구독하는 유일한 계간지이며문학에 대한 나의 욕망을 반추하고 과시하는 도구이자현대 한국 문학의 흐름을 깨우쳐 주는그런 책이다. 그런데, 책이 점점 엉터리가 되어가고 있다. 금번 겨울호의 기획기사는 “일본 문학, 왜 읽히는가”라는 정말이지 한번은 곰곰 생각해야 할 좋은 테마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시간에 쫓긴, 그리고 치열하지도 못한 평자들의 어수룩한 글 세꼭지를 대강대강 늘어놓고는나로 하여금 대체…

  • 갈매기·산화·수치·아버지·신랑 : 다자이 오사무 단편집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 실격’ 이후 틈날 때마다 찾아 읽는 작가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자살을 많이 시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묘한 호감을 가졌었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고백하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은 실은 인간 전체가 느껴야 하는 수치가 아닐까 합니다. 다만 다자이 오사무 스스로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불쌍한 인류에 대해 연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