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J에게

하루 종일 집안에 있다가 밤 산책을 나왔습니다.

동네 카페에 들러 음료를 하나 사 들고 삼천보 정도를 걸었습니다. 아파트 안 쪽에 있는 큰 광장의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조명이 꺼진 어둑한 공간에 빈 의자와 테이블이 가득하고 그 사이로 조용한 바람이 붑니다. 지난 번에도 이렇게 앉아있다가 음악 생각이 간절했는데, 오늘은 미리 이어폰을 챙겨왔습니다. night walking이라는 플레이리스트를 듣고 있어요.

이런 시간이야말로 제가 가장 좋아학는 것입니다. 행복하다기보다는 평온에 가까운. 혼자이면서 조용하고 시원해서 평화롭고 깊게 여러 생각에 잠길 수 있습니다.

아파트 내 쓰레기장에 내버려진 아직 충분히 쓸만한 가방과 의자와 장난감들을 보며, 유한한 지구의 자원을 저렇게 소모하는 것이야말로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책을 하며 마주치는 사물과 공간에 대해 이런 식으로 자유로운 생각을 펼치곤 합니다.

무한한 건 시간 정도가 있을까요? 우리가 막 써버리는 석유와 나무와 지구는 물론 태양도 끝이 있는 것을 알고 있고 무한 팽창한다는 우주도 사실은 끝이 있지 않을까 상상합니다. 그런데도 인류는 자기가 죽을 때가 되어야 겨우 그런 끝을 쳐다 보겠죠. 어리석습니다.

산책을 하며 많은 강어지를 만나게 됩니다. 눈인사나 손인사를 건네면 어떤 개는 사납고 어떤 개는 철없고 어떤 개는 무관심하죠. 저는 다른 사람에게 한없이 무심하고 경계심 많은 사람이었어요. 지금도 그걸 바꾸는 게 쉽지는 않지만, 작은 부딪침과 인연을 만드는 건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줍니다. 스스럼 없이 개방적이고 친절한 인사를 건네는 것.

J에게

고흐는 사람들에게 질려 아를로 들어갔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과 애정은 매우 매우 큰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애정이 고흐와 고흐의 그림을 아름답게 만들었지요.

며칠 후에 정기 검사 결과가 나와요.

별 일 없기를 (태연하게) 바라고 있지만, 혹 별 일이 생기더라도 (지금 기분 같아선) 이겨내보려고 애쓸 것 같습니다.

좀더 걷다가 들어가야겠어요.

제주의 푸른 밤, 즐거이 보내세요.

2023.06

Similar Posts

  • 아버지께

    아마 이 편지가 제가 아버지께 드리는 첫번째 편지인 것 같습니다. 맞지요? 살아 계실 때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도 잘 떠오르지 않으니 편지 같은 건 아마 국민학교 어버이날에 보낸 게 마지막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은 몇 주 전부터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이 아버지와 저의 나이가 같아지는 날이기 때문이에요. 돌아가시던 때의…

  • |

    H형

    사촌동생의 돌잔치에 갔다가 오랜만에 H형을 만났다. H형과 나도 사촌 지간이지만, 내가 H형에게 갖고 있는 친밀감은 웬만한 형제 못지 않을 것 같다. H형은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내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자전거의 펑크를 수리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참나무에서 장수벌레를 꺼내는 것도 알려주었지만 형은 내가 잠든 사이 그 장수벌레들을 몰래 풀어주곤…

  • |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요즘이제 막 아빠가 되려는 요즘,나를 아빠라고 아버지라고 부를 아들이 태어나려는 요즘,내 마음 속에서 메아리치는 시가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김남주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아무리 아쉬워도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나지 못할 수 있다.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제각기 모두 제철을잊지 않을 것이다.내가 늘 찾은 별은혹 그 언제인가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밤처럼서로…

  • |

    S형님께

    S형 오늘은 다시 출근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회사를 다니는 것이 지금 저한테 꼭 필요한 일인지 확신이 서진 않지만, 아프기 전의 일상으로 복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막상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무엇인가가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액상의 물이 딱딱한 얼음이 되었다가 다시 녹아 물이되는 것과 비슷할텐데요, (만약에…

  • |

    C에게

    이렇게 편지를 남기는 이유는 아마도 제가 좀 더 일찍 알게 된 까닭입니다. 지금 당신이 모든 힘을 다해 견뎌내고 있는 그 ‘몫’, 사실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집을 한권 샀습니다.김남주. 시인이자 혁명가,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충실했던 남자.가식과 거짓의 껍데기를 치우고 나면 그곳에는 안락하진 않아도 투명하고 맑은 진실이 있습니다. 눈이 시도록 밝은…

  • |

    첫 시집, 두번째 삶의 시작이 되길

    S에게 첫 시집이 나왔다는 카톡 메시지에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마침내, 너의 목소리를 듣는구나. 회사와 일과 접대, 아내와 아이들 같은 삶의 무게를 견디며 짬을 내 조각조각 이어 붙였을 그 목소리. 그래, 내가 아는 S는 시인이지. 대견하다. 언젠가는 나올 줄 알았어. 어디 볼까? 월정사에서 우물을 찾는다라… 기대감에 소개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덜컥 마음이 내려 앉았다. 평론가인 누님의 발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