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의 암, 1년이 지났습니다.

세번째의 암, 1년이 지났습니다.

스마트폰을 뒤적이다가 작년 이맘때 남긴 메모를 찾았습니다.


지난 추석,
긴 휴가를 앞두고 연중 행사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들른 병원에서 세번째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어투로 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의사의 한마디 한마디가 현실감이 없어서
아무 대꾸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받아야 할 검사를 예약하고 할 일을 챙겨 받고 병원을 나서 벤치에 잠시 앉았습니다.

어떤 후회나 결심, 아쉬움이나 슬픔, 두려움 같은 복잡한 감정 없이 그저 먼 발치의 하늘을 한참 내다 봤습니다.
하늘은, 추석을 앞둔 가을 하늘은 한없이 높이 푸르렀고 하얀 구름이 수채화의 붓자욱처럼 번져 있었습니다.

왈칵 눈물이 흘러 내렸고 오래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괜찮다, 다시 수술 받으면 건강해질거야, 괜찮다 준영아 괜찮아…’
아마 외할머니는 제 손을 마주잡고 등을 두드리며 절 위로해주셨을 거에요.


1년이 조금 더 지났습니다.

세번째의 암, 1년이 지났습니다.

몸은 1년 전보다 건강하지 않습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1년 전보다는 건강하겠네요. 그때는 위에 종양이 있었고 지금은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먹고 소화하는 것은 힘들어졌습니다, 그때는 1/3의 위가 남아 있었고 지금은 남아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위가 없이 사는 것은 꽤 힘든데 손이 하나 없는 정도는 아니겠지만 손가락 한 두개가 없는 만큼은 될 것 같습니다. 설사나 복통 때문에 밖에서 음식을 먹는 일이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운동은 1년 전보다는 많이 합니다. 산책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새로 골프나 요가를 배울 생각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체력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아직도 불쑥불쑥 어지럼증이 나올 때가 있고 특히 2차 덤핑 증후군으로 손발이 떨리고 심장 박동이 올라가 언제고 주저앉을 것 같이 힘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조금 더 잘 가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짐을 나눌 수 있는 깊은 우정이니까요. 그러나 그건 깊은 숲 속 나무처럼 더디게 자라는 것이라 맘처럼 쉽게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마음은 좀더 평화로워졌습니다. 나를 압박했던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음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에게는 좀더 무뚝뚝해졌습니다. 늘 따뜻하고 밝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그저 ‘내 몸이 힘든’ 것을 그렇게 내보이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건 좀 더 노력이 필요합니다.

책은 좀더 많이 읽고 있습니다. 뭔가를 배우고 익힌다기 보다는 책을 읽는 일이 제게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잡념을 지우는 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영화는 훨씬 더 많이 봅니다. 그야말로 즐거워서 보는 거죠. 넷플릭스는 제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웹사이트이자 앱입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계획은 훨씬 줄었습니다. 아예 생각하지 않을 때도 많고 기껏해야 올해 내년에 하고 싶은 일을 한두개 남겨둔 정도입니다.

게임 하는 시간도 많이 줄었습니다. 새로 시작할 재미있는 게임을 못 찾은 이유가 더 큰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시간은 가고 이렇게 한 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건강하게 한 해를 넘긴 것처럼 이 글을 읽는 다른 분들과 제가 좋아하는 모든 분들도 건강하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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