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 #소진 #쇠약 #평정 #아쉬움 #지루함
|

무상 #소진 #쇠약 #평정 #아쉬움 #지루함

며칠 전 아침 일찍 휴맥스빌리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있던 날, 옆에 섰던 동지와 잡담을 나누다 불쑥 속마음을 늘어놓게 됐다.

“이만하면 다 산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대충은 해봤고”

말을 뱉어놓고 아차 싶었는데, 그가 갑작스런 사랑 고백을 들은 것처럼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직 재밌는 게 많을껄요”

삶이 고통이라는 부처의 진리를 깨닫지는 못했지만 삶이 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무상 #소진 #쇠약 #평정 #아쉬움 #지루함

허수경의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들추다가 죽은 어미의 뱃 속에서 태어나 인간의 젖을 먹은 양의 이야기를 읽었다. 단숨에 써내려갔음직한 황량하고 어두운 유라시아 대륙의 어느 외진 촌락이 떠오르는 시였다. 허수경 시인은 일생을 낯선 독일에서 지내며 한국어로 시를 썼고 54세에 죽었다. 그녀의 생은 외롭고 축축한 새끼 양과 다르지 않았다.

작년에 친구가 죽은 이후에 부쩍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자문한다. 혹은 이 질긴 생명은 언제까지 버텨줄 것인가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내가 부덕한 탓이다. 사람들과의 오랜 인연을 툭툭 끊어내도 아깝거나 두렵지 않다.

쉽게 죽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날들이 많아지고 있다.

Similar Posts

  • 두달 후

    세번째의 암 수술을 마치고 두달이 지났다. 2기A의 위암을 제거하고, 남아있던 위를 모두 절제하는 수술이었다. 아직도 먹는 일은 버겁다. 위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소화하는 게 쉽지 않고 먹는 양이 줄으니 체중이 줄고 기력이 없는 상태이다. 물론 두달 전과 비교한다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도 조금 더 다양해졌고 산책도 한시간 정도 다닐 수 있지만 정상인에 비하면 턱없이…

  • 위 전절제 환자의 저혈당 증세 대처법

    위 전절제 수술을 받고 나면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바로 저혈당 증상이다. 밥을 먹었는데 왜 혈당이 떨어지는 걸까? 처음 겪으면 당황스럽고, 반복되면 두렵다. 나 역시 수술 후 4년이 지난 지금도 이 증상과 싸우고 있다. 왜 밥을 먹었는데 저혈당이 올까 위는 단순히 소화만 하는 기관이 아니다. 음식을 잠시 보관했다가 소장으로 천천히 내려보내는 조절 역할을 한다….

  • |

    녹색은 어떻게 낙태 권리의 국제적인 색깔이 되었을까?

    6월 24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낙태권을 보장하는 ‘로 대 웨이드’ 판례(Roe v. Wade)를 폐기하는 끔찍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제 미국에서 낙태는 헌법적 권리가 아니며 낙태 허용 여부와 범위는 각 주의 법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롹 그룹 RATM은 빈곤층,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권리를 제한하는 대법원의을 비난하며 티켓 판매로 모인 후원금 47만 5천 달러를 위스콘신주, 일리노이주의 재생산 권리를 위한 단체에 기부한다고…

  • 다시, 일상으로 II

    작년 6월 1일 복직 후 1년이 지났습니다. 이런 저런 결심을 붙여가며 각오를 다졌었는데 1년의 회사 생활이 지나고 나니 그 각오와 다짐은 온전히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자기 방어기제였던 것 같습니다. (재택 근무하는 날이 좀 더 많긴 하지만) 출근을 하고 안건을 토의하고 보고를 하고 논쟁하고 할 말과 감정을 속으로 감추는 일들은, 인생을 즐겁게 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는…

  • 강을 건너다

    그 곳에서는 또 다른 형태로 삶이 있었다. 큰 강을 사이에 두고 강 이쪽은 현재의 지구와 비슷하지만 훨씬 덜 분주하고 훨씬 더 깨끗한 일상이 있었고, 강 건너 저쪽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강을 건너간 사람들과는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크고 작은 이별이 쉴 새 없이 진행됐고 사람들은 조용히 강을 건너갔다….

  • 8차 정기 검진

    11월 17일 8차 정기 검진이 있었습니다. 1년에 2번씩이니까 세번째의 암 수술을 받은 지 만 4년이 되어가나 봅니다. 혈액 검사, 흉부 엑스레이, 복부 CT, 위 내시경, 대장 내시경 등등. 늘 하던 대로, 남들보다 훨씩 익숙하게, 검사를 받습니다. 상박을 묶고 주먹에 힘을 주었다가 폈다가 반복합니다. 팔꿈치 안쪽의 정맥에 주사 바늘이 들어가고 검붉은 정맥혈이 채혈보틀에 들어갑니다. 하나,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