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윤학 – 순간

퇴근 길에 읽은 이윤학의 시 한수.
가슴이 저릿하다.

(볼드나 이탤리은 원문에는 없음)

순간
개운산 동쪽 편에는
소원을 비는 그리 크지 않은 터가 있는데
가끔 몸빼를 입은 할머니들이 찾아와
알루미늄 새시 안 소형 불상 앞에 초를 밝히고
연신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들 손이
한 바퀴씩 비벼지곤 하는데 어떤 이는
한 바퀴 빙빙 돌면서 그 의식을 진행하는데
촛불은 심지를 잡아끌고 있는데
나는 점점 더 부끄러워지고 있는 것이다.
누굴 위해 간절했던 적이 별로 없던 내게도
원을 그리는 손에서 생긴 것 같은 온기가
느껴져 더더욱 부끄러워지곤 하는데
거기 몇 평 안 되는 모래 많이 섞인 땅에서는
손바닥에서 떨어진 것인지
모래 크기보다 훨씬 작은 빛이 나곤 하는 것이다.
산책 갔다 오는 개가 앞만보고 주인 앞에 서서
급한 경사 길을 내려오는 것이
참 예뻐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바람에 날려 하얗게
손바닥을 펴 보이는 내 닥나무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이다.
내 닥나무에게도 순간, 순간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한참 동안 울먹거릴 운명이
내게도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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