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윤학 – 순간

퇴근 길에 읽은 이윤학의 시 한수.
가슴이 저릿하다.

(볼드나 이탤리은 원문에는 없음)

순간
개운산 동쪽 편에는
소원을 비는 그리 크지 않은 터가 있는데
가끔 몸빼를 입은 할머니들이 찾아와
알루미늄 새시 안 소형 불상 앞에 초를 밝히고
연신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들 손이
한 바퀴씩 비벼지곤 하는데 어떤 이는
한 바퀴 빙빙 돌면서 그 의식을 진행하는데
촛불은 심지를 잡아끌고 있는데
나는 점점 더 부끄러워지고 있는 것이다.
누굴 위해 간절했던 적이 별로 없던 내게도
원을 그리는 손에서 생긴 것 같은 온기가
느껴져 더더욱 부끄러워지곤 하는데
거기 몇 평 안 되는 모래 많이 섞인 땅에서는
손바닥에서 떨어진 것인지
모래 크기보다 훨씬 작은 빛이 나곤 하는 것이다.
산책 갔다 오는 개가 앞만보고 주인 앞에 서서
급한 경사 길을 내려오는 것이
참 예뻐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바람에 날려 하얗게
손바닥을 펴 보이는 내 닥나무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이다.
내 닥나무에게도 순간, 순간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한참 동안 울먹거릴 운명이
내게도 찾아온 것이다.

Similar Posts

  • 산문. 소유란 무엇인가. 조제프 크루동

    이토록 힘찬 아나키의 근본이여.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의 소유란 무엇인가에 감명 받고 있습니다. 1장의 첫구절을 잠깐 보세요. 만일 내가 <노예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해야만 한다면, 그래서 내가 한마디로 <그것은 살인이다>라고 답한다면, 나의 생각은 당장 이해될 것이다. 인간에게서 사상, 의지, 그리고 인성을 빼앗을 수 있는 권력은 곧 생사여탈의 권력이며, 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그를…

  • 비둘기호. 김사인

    비둘기호 / 김사인 여섯 살이어야 하는 나는 불안해 식은땀이 흘렀지. 도꾸리는 덥고 목은 따갑고 이가 움직이는지 어깻죽지가 가려웠다. 검표원들이 오고 아버지는 우겼네. 그들이 화를 내자 아버지는 사정했네. 땟국 섞인 땀을 흘리며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나는 오줌이 찔끔 나왔네. 커다란 여섯살짜리를 사람들은 웃었네. 대전역 출찰구 옆에 벌세워졌네. 해는 저물어가고 기찻길 쪽에서 매운바람은 오고 억울한 일을 당한…

  • 고양이는 처음이라 : 고양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법

    그냥 만화책으로 봐도 재미있습니다. 집에 알러지 있는 사람이 두명이나 있어 고양이를 키우진 못하지만 고양이는 정말 매력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됐습니다. 그간 SNS에서 즐겁게 봤던 여러 고양이 영상들을 떠올리면서 즐겁게 읽었고 고양이 지식이 좀더 늘어났습니다. 관련된 글: 만화. 맛있는 관계. 사토루 모키무라 만화. 피바다 학생작품집 1 Akiko Hatsu – 꿈 그리고 환상 26/100 만화 도쿠가와…

  • 소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신작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맘에 든다. 꽁트라고 해도 좋을만큼 짧은 글이 12개 – 초록반지, 보트, 지는 해, 검정 호랑나비, 다도코로 씨, 조그만 물고기, 미라, 밝은 저녁, 속내, 꽃과 비바람과 아빠의 맛,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적당함 -, 그 각각의 글이 지닌 여운은 아주 깊다. 누군가 자신의 일상을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 12/100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신시야 샤피로 지음, 공혜진 옮김/서돌 이 책은 리더쉽과 코칭, 팀웍과 성과라는 유사한 주제를 다루는 많은 서적들과 그 톤이 매우 다르다. 나쁘게 말하면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이며 좋게 말하면 그래도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라고 평할 수 있다. 회사가 대외 홍보용으로 내세우는 가치규범을 믿지 마라 : 이 책에 의하면 여전히 회사는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가족보다는 일을…

  • 장정일의 독서 일기

    나는 책 읽기에 대해 엄청난 의무감을 가지고 있고 늘상 부족하고 모자르다 생각하고 있다. 2006년에는 100권의 책을 읽기로 결심하고 그 해 연말에는 55권의 책을 읽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1년에 55권은 주에 한 권 정도 읽는 템포. 2006년에는 야후에 있던 때였고, 그 때 까지만 해도 나는 전 세계 인터넷 쇼핑의 표준이 될만한 상품 페이지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