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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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에게

    지난 주 네가 전해준 의외의 소식은 주말 내내 나를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작년 언젠가 논현역 어디쯤을 나란히 걷던 기억. 동남아시아 IT 인력의 효율성과 조선일보에 나왔다던 서울 밤의 지나치게 밝은 조도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기억 말이야. 그리고 널 마중 나온 남편과 조카들. 특히 조카들의 밝은 표정과 눈빛에서 네가 얼마나 좋은 엄마일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단다….

  • J에게

    하루 종일 집안에 있다가 밤 산책을 나왔습니다. 동네 카페에 들러 음료를 하나 사 들고 삼천보 정도를 걸었습니다. 아파트 안 쪽에 있는 큰 광장의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조명이 꺼진 어둑한 공간에 빈 의자와 테이블이 가득하고 그 사이로 조용한 바람이 붑니다. 지난 번에도 이렇게 앉아있다가 음악 생각이 간절했는데, 오늘은 미리 이어폰을 챙겨왔습니다. night walking이라는 플레이리스트를 듣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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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에게

    Y야바람처럼 쉬이 네게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널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1년하고도 6개월 전이었으니까. 그즈음 나는 큰 수술을 받고 나서 매우 힘들었다.무려 세번째의 암수술.메스로 잘라낸 건 위장이었지만 더 많이 찢겨 나간건 마음인 것 같아.조만간 모든 게 끝날 지도 모른다는 막막함. 차라리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 싶은 절망감. 그런 감정의 밑바닥에서 내 장례식에 와서 한번쯤은 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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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에게

    우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제 당신 생각을 좀 했습니다. 새해 인사도 못했는데 문자라도 보내야지 했다가 이런 저런 감상이 길어져 편지를 쓰게됐습니다. ‘살아 있는 게 좋구나’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 없이 높은 하늘, 뺨을 간지르는 바람의 부드러움, 차마 올려다 볼 수 없는 눈부신 햇살, 계절의 변화에 철두철미한 나무와 나뭇잎, 꽁꽁 얼어버린 호수, 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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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누님께

    새벽 두시가 가까워졌습니다. 초복의 여름 밤, 습기 하나 없이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데 통 잠을 이룰 수가 없네요. 오후에 낮잠을 조금 자긴 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 진짜 이유는 젊은 날의 뜨겁고 빛나는 시절들이 머리 속에 돌아온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누나를 만나 이야기하면 떠오른 이십 몇 년 전의 과거가 지금의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어요. 스무살에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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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형님께

    S형 오늘은 다시 출근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회사를 다니는 것이 지금 저한테 꼭 필요한 일인지 확신이 서진 않지만, 아프기 전의 일상으로 복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막상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무엇인가가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액상의 물이 딱딱한 얼음이 되었다가 다시 녹아 물이되는 것과 비슷할텐데요, (만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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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들지 못하는 당신께

    매일 밤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해 결국은 방불을 켜고 침대에 양반다리로 앉고 마는 당신의 모습을 새벽마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배가 아파 화장실을 들락거릴 때도 있고, 음악을 듣다가 먼 과거로 빠져들기도 하고, 가끔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세어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당신의 불면증은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 지 확실하지 않은데 이렇게 회복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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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형

    사촌동생의 돌잔치에 갔다가 오랜만에 H형을 만났다. H형과 나도 사촌 지간이지만, 내가 H형에게 갖고 있는 친밀감은 웬만한 형제 못지 않을 것 같다. H형은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내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자전거의 펑크를 수리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참나무에서 장수벌레를 꺼내는 것도 알려주었지만 형은 내가 잠든 사이 그 장수벌레들을 몰래 풀어주곤…

  • 턱 수염이 없는 자화상 – 반 고흐

    제가 건강해져서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그림은 아마 제 대표작이 될 거에요. -빈센트 반 고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흐는 죽기 1년 전인 1889년 ~ 1890년 사이 정신 병원에 입원해있었지만, 그 기간 약 150점의 유화를 그렸고 많은 대표작들이 탄생했다.이 작품은 1889년 일흔번째 생일을 맞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는데 199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화로 750억원에 팔렸다.그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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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아들로부터 받은 첫번째 편지

    아침 출근 길에 받은 아들의 편지.겉에는 “아빠”라고 씌여있고, 밥풀로 봉했다. 편지지는 모 은행의 광고 전단지인듯 하다. 펼쳐보니 하트가, 감동적이다. 큰 아들 예준이는 매우 거친데, 한편 마음이 여리고 배려도 많고 섬세하다.할머니가 보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아침 출근할 때마다 “아빠 사랑해” 포옹과 하이파이브와 뽀뽀를 잊지 않는 아들이다. 둘째 민준이는 쳐다보지 않을 때도 많은데 말이다.언젠가는 유치원 버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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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아들을 위한 두번째 편지

    민준아. 이제 두번째 생일, 먼저 축하한다.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고맙다. 부모들은 늘 이런 상투적인 인사 밖에 하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PS. 큰 아들을 위한 세번째, 네번째 편지는 어째서 없는 것일까? 1년에 편지 한통 쓰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앞으로 식구들 생일에는 편지를 한통씩 남겨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