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고명재 –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색을 빼내 드러난 투명한 빛 고명재의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은 일상의 언어로 사랑을 요리하는 시집이다. 시인은 밀가루, 수육, 튀김, 기름처럼 평범한 식재료를 다루듯 단어를 배치한다. 그런데 이 단어들이 논리적 인과 없이 나란히 놓이는 순간, 묘한 균열이 생긴다. 식탁 위의 풍경이 성스러운 제단으로 바뀌고, 요리하는 행위가 애도와 기도로 전환된다. ‘수육’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색을…

  • 다시, 일상으로 II

    작년 6월 1일 복직 후 1년이 지났습니다. 이런 저런 결심을 붙여가며 각오를 다졌었는데 1년의 회사 생활이 지나고 나니 그 각오와 다짐은 온전히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자기 방어기제였던 것 같습니다. (재택 근무하는 날이 좀 더 많긴 하지만) 출근을 하고 안건을 토의하고 보고를 하고 논쟁하고 할 말과 감정을 속으로 감추는 일들은, 인생을 즐겁게 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는…

  • 근황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찬 바람이 느껴지면 물처럼 맑은 콧물이 줄줄 흘러 내리는 비염이 난리 칩니다. 지난 여름 오버핏 티셔츠와 배기바지로 비쩍 말라버린 몸매를 감춘 것처럼 겨울에 입을 빅사이즈 티셔츠 몇 장과 면바지 몇 장을 샀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있습니다. 뭐, 그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로 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한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일이…

  • 두 달 만의 자전거 타기

    동백 – 기흥 호수 구간을 두 달 만에 다녀왔습니다. 그동안 장마와 폭염으로 라이딩을 쉬었는데, 체력이 다시 엉망이 되서 힘들었습니다. 호우의 끝이라 길 곳곳에 웅덩이가 있고 흙 쌓인 곳도 많고 심지어 다리가 휘어진 곳도 있어서 원상태로 회복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요. 2022년 08월 20일 거리: 21.07km 시간: 1:13:24 평속: 17.2km/h 평균 케이던스: 67 평균…

  • |

    모처럼의 새벽

    아마도 ‘하아’ 소리를 낸 것 같습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는데 안도인지 놀람인지 모를 큰 숨에 잠이 깼습니다. 5시가 조금 안된 시간, 여명이라기엔 날이 이미 매우 밝습니다. 자전거를 탈까 싶었지만 가뜩이나 칼로리가 부족한 상황이라 공복 유산소는 아무래도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머리 맡의 스마트폰을 켜고 스포티파이에서 early morning을 검색합니다. 시끄럽지 않을만한 플레이 리스트를 골라 음악으로 방을 채우고 침대에…

  • |

    다시, 일상으로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왔습니다. 2021년 9월 17일, 정기 추적검사 결과 암이 재발했다는 진단을 받았고 2021년 11월 8일 위암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나마 남아있던 위장마저 모두 제거되어 이제 저는 위가 없습니다. 좋은 점은 위염이 걸리거나 위가 쓰릴 일이 없다는 점이고 나쁜 점은 배고픔이나 배부름을 잘 느끼지 못하고 소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배탈이…

  • |

    타바스코 핫소스로 만든 닭볶음탕

    어찌된 일인지 병상에 동생이 누워 있었다. 큰 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술을 앞두고 있어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작은 병실이 가득 찼고 앉을 자리가 없었지만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준비한 매트를 병실 바닥에 깔았고 식구들은 엉덩이만 겨우 걸친 채 둘러 앉아 점심을 먹기로 했다. 어머니는 늘 이런 준비가 넘친다. 아내가 ‘타바스코 핫소스로 만든 닭볶음탕’을 꺼내며…

  • 사진집. Tree, Body and Snow

    일반적으로 보아왔던 잘 찍은 혹은 멋진 사진들과는 조금 다른 사진집이었습니다. 일상을 포착하는 작업이었다고 하는데, 한장 한장은 별 특징이 없었지만 이렇게 모아서 보니 색다른 감상이 들었습니다.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사진집이었습니다. 사진작가 고천봉의 두번째 사진집인데, 사진집의 말미에는 ‘나는 사진가가 아닙니다’라는 단편 소설이 실려있습니다. 일상의 사진을 모은 사집집에 사진가가 아니라는 고백을 듣고 보니 일상이야말로 우리의 삶…

  • 삶의 이면 – 한강.채식주의자

    삶은 위태롭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삶의 이면은 살얼음처럼 아슬아슬하다. 아주 작은 진동에도 깨질 수있고 한번 깨지면 되돌릴 수 없다. 그 균열은 삶을 송두리째 빨아 들여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얼어 붙은 호수 한 가운데서 꼴깍거리며 의식을 잃어가는 어린아이처럼 무기력하다. 물론, 그 어린 아이를 지켜보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한강이라는…

  • 2019년이 되었다.

    제목을 쓴 후, 깜박이는 커서를 지켜보다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연도가 바뀌는 것은 나이가 한살 더 늘어난다는 뜻이며 그에 비례해서 남은 가능성은 줄어든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될 지, 생이 끝나고 나면 남는 후회나 안도는 무엇일지. 2018년에 꽤나 공들여 작성했던 리스트가 있다. 올해는 몇개라도 달성해 보겠다….

  • |

    여름 밤

    온기가 남아있지만 끈적이지 않는다. 시원하거나 차가운 느낌도 없지만, 살갗에 닿는 바람의 온도가 조금 낮아진 것만으로도 가을 생각은 자연스럽다.또 하나의 계절이 이렇게 반복되고 있다. 둘째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치열한건지 비열한 건지 알 수 없는 내 삶에 넌덜머리가 나기 시작했다.사이드 미러 뒤로, 한 쪽 헤드라이트가 나간 트럭 한대가 엉금엉금 따라오는 모습이 기괴하다.

  • 어제 민준이는 밤새 ‘엄마’를 찾으며 낑낑댔다. 아내의 호통소리와 달…

    어제 민준이는 밤새 ‘엄마’를 찾으며 낑낑댔다. 아내의 호통소리와 달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지만 민준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자는 내게도 그런 정도였으니 수영이는 어땠으려나. 그러나 한편 예준이는 잘자고 오늘도 6시에 일어나 토마스를 굴리며 혼자 놀기 시작했다. 일상은 비슷한 듯 하나 시간은 매우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