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재 –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고명재 –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고명재 –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색을 빼내 드러난 투명한 빛

고명재의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은 일상의 언어로 사랑을 요리하는 시집이다. 시인은 밀가루, 수육, 튀김, 기름처럼 평범한 식재료를 다루듯 단어를 배치한다. 그런데 이 단어들이 논리적 인과 없이 나란히 놓이는 순간, 묘한 균열이 생긴다. 식탁 위의 풍경이 성스러운 제단으로 바뀌고, 요리하는 행위가 애도와 기도로 전환된다.

‘수육’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색을 다 뺀 무지개를 툭툭 썰어서 / 간장에 찍은 뒤 씹어 삼킨다”고 쓴다. 삼겹살을 삶으면 붉은 살점과 하얀 지방의 색이 빠져 허연 수육이 된다. 이 수육을 ‘색을 뺀 무지개’로 부르는 순간, 평범한 저녁 식탁은 애도의 의식이 된다. “죽은 사람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 것, / 입 속에서 일곱 색이 번들거린다”는 다음 행은 더 놀랍다. 색을 잃은 음식을 씹는데 입안에서는 일곱 색이 빛난다. 슬픔을 억지로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색이 빠진 자리에서 오히려 더 선명한 빛이 솟아오른다는 깨달음이다.

무연한 언어들의 환기

고명재 시의 힘은 연관 없는 일상어들을 나란히 배치할 때 발생하는 환기 효과에 있다. ‘페이스트리’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유골”과 “빵 반죽”이, “언덕”과 “발효”가, “인연”과 “크루아상”이 같은 문장 안에 섞인다. 이 무연한 배치는 독자의 고착된 사고를 흔든다. 빵을 굽는 냄새가 기도가 되고, 반죽을 치대는 손길이 죽은 자를 만지는 행위가 된다.

‘시와 입술’에서는 기름의 이름들이 사랑의 언어로 둔갑한다. “올리브유: 올리버올리버올리버올리버 / 당신의 이름을 연거푸 말하면 여름이 불타고”라는 구절은 음식과 신체, 언어와 빛을 한 문장에 겹쳐놓는다. 참기름, 카놀라유, 해바라기유, 개기름이라는 단어들은 각각 “가장 참된 것”, “꽃이 될 뻔했던 씨의 땀”, “웃는 걸 본다”, “눈길만으로 불이 붙을 때”로 번역되며 사랑의 형태를 드러낸다. 시인은 관념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무관해 보이는 사물들을 나란히 세워두고, 그 사이의 빈틈에서 사랑이 새어나오게 만든다.

투명한 몸, 투명한 사랑

고명재의 시에서 몸은 자주 투명하다. ‘뜸’에서 한의사는 명재씨의 손목을 짚고 “안개꽃이 한 다발 보인다”고 말한다. “속이 차요”라는 진단은 단순한 의학적 소견이 아니라, 차가운 이별과 실패한 사랑의 흔적을 읽어내는 행위다. 쑥이 타면서 뜸의 열이 배에 전해지고, 그 열기 속에서 “아이가 부풀고” “눈이 내린다”. 시인은 몸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 남은 사랑의 잔상을 드러낸다.

고명재는 언어라는 식재료를 치대어 위로라는 빵을 굽는다. 그의 시에서 사랑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색채를 잃은 무지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아니 오히려 투명하기에 더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이 시집은 증명한다. 무연한 단어들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균열 사이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사랑의 빛이 번들거린다.

Similar Posts

  • 1/100. The Goal

    TOC & OPT. 많이 들어는 봤으나 무엇인지 모르는 유명한 어떤 것. 이 책은 일반의 경영학 서적과는 달리현장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인 일반론으로 접근하는 유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가?’,‘어떤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하는가?’,‘어떻게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이 세가지 단순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고 있는 거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리자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 산문. 2/100 광기와 우연의 역사. 스테판 츠바이크

    역사가 뒤바뀌는 중요하고도 희귀한 그 찰나의 시간,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우스꽝스럽게도 매우 비합리적이고 우연한 사건에 기인한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몇몇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나름의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있고 가볍게 흘려 읽기에 좋은 에세이.– 남극에서 얼어죽은 비운의 탐험대장 스콧–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오스만 튀르크의 잔인한 무하마드–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발보아– 대서양에 해저 케이블을 설치한 사이러스 필드등의 이야기는 재미있으나…

  • 어제와 오늘의 한국인

    당분간은 좀 쉬운 책을 읽을 생각입니다.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진 데다가 불안감도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여서 집중해서 무언가를 공부 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화집, 사진집, 베이킹, 목공, 건축, 예술 등의 취미 관련 서적들에 손이 갑니다. 이 책은 사진집입니다. 1979년부터 1994년까지 신동아에 실린 ‘오늘의 한국인’ 코너에서 박용윤의 사진을 추려낸 것입니다. 박용윤은 처음 알게된 사진작가인데 신문사 사진 작가로 활동했고…

  • 산문. 1/100 삼국지를 보다

    삼국지를 보다김상엽 지음/루비박스 2007년 들어 처음 연 책이다. 한/중/일 3국의 회화를 통해 각국의 삼국지 이해 양상과 문화 교류 등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삼국지 관련 그림들은 독특하게도 장수들이 모두 사무라이 풍이라는 것. 예나 지금이나 타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는 일본의 능력은 감탄스럽다. 정사와 연의를 두루 뒤져 역사와 소설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도 재미있다. 삼국지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 9/100 이런 팀장이 회사를 살린다.

    이런 팀장이 회사를 살린다김승용 지음/미래지식 아, 무척이나 재미없는 책이다. 아래와 같은 구절을 읽다 보면 짜증이 절로 난다. 우수한 팀장이 되기 위해서는 사명감이 투철해야 한다. 사명감이란 책임감보다 강한 느낌을 주는 마음의 상태로서, 사리사욕을 억제하고 자신을 회사 속에 매진시킬 수 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 회사에서 나의 인생을 걸어보자’, ‘업무에 매진해보자’, ‘이 회사에서 내 인생의 승부를 걸어보자’고 하는…

  •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이어령의 죽음 전 인터뷰가 와 닿아 옮겨둔다. 이미 10년 전에 암으로 딸을 잃었고 이어령 역시 암이었는데 그는 항암 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제 너의 곁으로 간다는 그 마음은 십분 이해가 간다. 나 역시 세번의 암 수술 끝에 삶과 죽음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는 많이 생각할 수 밖에 없었는데, 견뎌야 할 고통은 오롯이 내 것이지만 그외의 모든 세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