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로 걸어가는 남과 여. 김성규
적도로 가면 만날 수 있다는 확신, 태양이 져도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는 불변의 진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면 적도에서는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지구에서 가장 길고 뜨거운 불변의 선, 적도.
적도로 가면 만날 수 있다는 확신, 태양이 져도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는 불변의 진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면 적도에서는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지구에서 가장 길고 뜨거운 불변의 선, 적도.
오래된 서랍. 강신애 나는 맨 아래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다더이상 보탤 추억도 사랑도 없이내 생의 중세가 조용히 청동녹 슬어가는 긴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서랍을 연다노끈으로 묶어둔 편지뭉치, 유원지에서 공기총 쏘아맞춘신랑 각시 인형, 건넨 이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코 깨진 돌거북, 몇 권의 쓰다 만 일기장들…… 현(絃)처럼 팽팽히 드리운 추억이느닷없는 햇살에 놀라 튕겨나온다 실로 이런 사태를 나는 두려워한다…
좋아하는, 존경하기 보다는 좋아하는 시인이었다. 그녀의 슬픈 웃음 소리 ‘킥킥’을 듣고나서부터 나는 그 발랄한 슬픔에 푹 빠졌다.들춰보니, 몽생 취사하고, 불취불귀하여, 모든 게 흐릿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내 기억에 어느 여대의 교수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무언가 뒤섞인 뿌연 기억이었나 보다. 독일로 유학을 간 것도, 거기서 현지인 교수와 결혼을 한 것도, 암에 걸린 것도, 아무 것도 알 지 못했다.지금…
마음이 허허하다.책장을 덮고나니 ‘엄마’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들이 가득하지만 그게 반드시 뭔가를 후회하거나 그래서 더 잘해야겠다 거나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 이런 삶도 있었지, 모양은 다르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다 이럴거야, 이런 면은 우리 엄마랑도 비슷하네, 나도 언젠가는 이런 후회를 하겠지… 봄 햇살이 드는 창가 침대에 앉아 작가의 말, 마지막 문단을 읽으면서 아쉼이 컸다. 더 읽고…
속수무책 김경후 내 인생 단 한 권의 책속수무책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척하고 내밀어 펼쳐줄 책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진흙참호 속묵주로 목을 맨소년병사의 기도문만 적혀있어도단 한 권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찌그러진 양철시계엔바늘 대신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독서중입니다, 속수무책 유쾌하다. 읽고 나서 나는 씨익하고 웃어버렸다.“어쩌라고?”나는 속수무책이지만,…
어제는 내가 졌다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오늘도 나는 졌다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적은 내게 모두를 댓가로 요구했지만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善)이라고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거기서 끝까지 싸워야눈빛이…
Pure life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코스타리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인사말 뜻 : 인생은 좋은 것, 다 잘 될 거야, 아등바등하지 않고 고만고만한 것이 좋다 코스타리카 :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늘 첫손가락에 꼽히는 나라, 국토의 4분의 1이 국립공원인 나라, 평화와 인권이 국가브랜드가 된 나라. 코스타리카는 외침과 내전이 끊이지 않던 라틴아메리카 한가운데서 1948년 군대를 없앴고, 국방비를…
사랑한다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비가 그친 뒤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강물을 내려다본다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사랑한다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윤동주의 서시너의 어깨에 기대고 싶을 때너의 어깨에 기대어 마음놓고 울어보고 싶을 때너와 약속한 장소에 내가 먼저 도착해 창가에 앉았을 때그 창가에…
오뉴월 김광규 우리가 만들어낸 게임보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장끼 우짖는 소리 꾀꼬리의 사랑 노래 뭉게구름 몇 군데를 연녹색으로 물들입니다 승부과 관계없이 산개구리 울어내는 뒷산으로 암내 난 고양이 밤새껏 쏘다니고 밤나무꽃 짙은 향내가 동정의 열기를 뿜어냅니다 환호와 야유와 한숨이 지나간 자리로 남지나해의 물먹은 회오리바람 북회귀선을 넘어 다가오는 소리 곳곳에 탐스럽게 버섯으로 돋아나고 돼지우리 근처 미나리꽝에서 맹꽁이들 짝…
당신…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의 기대. 나 킥킥…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때 당신….그대라는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금방 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