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차 정기검진

9차 정기검진

검사 시간이 오후로 잡혔다. 어젯저녁부터 거의 열여덟 시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고픔도 목마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이상하리만치 맑아졌고, 그 고요한 틈으로 답답함과 좌절과 허망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천천히, 그러나 절절하게 차올랐다.

얼마나 더 아프고, 얼마나 더 힘들어야 이 싸움이 끝날까.

주차를 하고 병동으로 향하는 길에 낯선 출입구를 발견했다. 새 길인가 싶어 아내에게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병원 안쪽 길을 이렇게 잘 알게 된 자신이 반갑지 않다고. 나란히 걷는 길, 햇살은 뜨거웠지만 마음은 점점 무겁고 차가워졌다.

수납을 마치고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하며 채혈을 했다. 늘 그렇듯 5번방에서 흉부 엑스레이를 찍었다. 익숙한 순서, 익숙한 검사실, 익숙한 자세. 그 익숙함이 편안함이 아니라 씁쓸함으로 느껴진 지 오래됐다.

9차 정기검진

CT 촬영을 위해 왼팔 정맥에 카테터를 꽂았다. 익숙한 일이지만 바늘이 두꺼워 새삼 아팠다.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쉬고. 연습을 한 번 하고 나서 조영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사관이 꽂힌 혈관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니—팔뚝으로, 어깨로—이내 온몸이 뜨거워졌다. 입안이 썼다. 이쯤 되면 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지겹다. 그만하고 싶다.

그 마음을 숨기고 눈을 감은 채 숨을 참고 숨을 쉬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고 카테터를 제거했다. 굵은 바늘이 꽂혔던 자리에는 두꺼운 거즈가 붙었다.

모든 검사가 끝났지만 주차장까지 걸어갈 힘조차 없어 대기실 의자에 한참 앉아 있었다. 5시, 밥을 먹기도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영업 중인 식당을 찾아갔다. 몇 숟가락 넘기자마자 속이 요동쳐 화장실로 가야 했다.

금식을 하고, 검사를 받고, 쉬어야 하고, 밥을 먹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이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만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웃긴 게 아니라,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뭘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눈을 떠보니 침대 위였다.

유독 힘든 하루였다.

Similar Posts

  • 암 환자와 이야기하는 방법

    cancer.net에서 옮깁니다.원문: Talking With Someone Who Has Cancer 암 진단과 함께 슬픔, 분노, 혼란 및 무력감의 감정이 생깁니다. 암 진단을 받은 사람에게 친구와 가족이 위안을 주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때 도움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암에 걸린 사람과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할 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연락하는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보다 항상 낫습니다. 다음은…

  • 8차 정기 검진

    11월 17일 8차 정기 검진이 있었습니다. 1년에 2번씩이니까 세번째의 암 수술을 받은 지 만 4년이 되어가나 봅니다. 혈액 검사, 흉부 엑스레이, 복부 CT, 위 내시경, 대장 내시경 등등. 늘 하던 대로, 남들보다 훨씩 익숙하게, 검사를 받습니다. 상박을 묶고 주먹에 힘을 주었다가 폈다가 반복합니다. 팔꿈치 안쪽의 정맥에 주사 바늘이 들어가고 검붉은 정맥혈이 채혈보틀에 들어갑니다. 하나, 둘,…

  • 입원 준비물

    암 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일주일 길게는 몇달까지 입원을 해야 합니다. 집에서 사용하던 일용품을 모두 가져갈 수는 없지만 입원하는 첫날부터 필요한 물품들도 있어 미리 준비하면 집을 왔다갔다 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습니다. 수술을 하고 나면 사실 환자는 세수를 할 여력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만, 보호자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세수는 물론 머리도 감고 때에 따라 기본적인 화장도…

  • 배부른 사자처럼

    요즘 산책을 할 때는 음악 대신 오디오북을 듣는다. 명상에 관한 책이다. 쿤달리니, 차크라, 경혈, 우주, 햇빛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중 그래도 선명하게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는 문장이 있었다. 배부른 사자처럼 느긋하게 숨 쉬세요. 미래를 걱정하는 생물은 사람 밖에 없다고 한다. 동물들은 그저 지금, 지금 살아 남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그러니 배부른 사자는 얼마나 느긋하겠는가….

  • 테타니 증상으로 119

    무심하게도, 그리고 비참하고 애석하게도 다시 119를 타고 응급실로 실려갔다. 이틀을 쉬고 이제야 상황을 정리해둔다. 4월 8일 오후, 모처럼 여유 시간이 생겨 산책 겸 사진 촬영을 위해 화성 행궁에 들렀다. 얼마 걷지도 않았고 무리한 일도 없는데 갑자기 왼쪽 종아리가 석고처럼 단단하게 경직되며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털썩 주저 앉았고 고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종아리에 집중되는 통증을…

  • 다시, 일상으로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왔습니다. 2021년 9월 17일, 정기 추적검사 결과 암이 재발했다는 진단을 받았고 2021년 11월 8일 위암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나마 남아있던 위장마저 모두 제거되어 이제 저는 위가 없습니다. 좋은 점은 위염이 걸리거나 위가 쓰릴 일이 없다는 점이고 나쁜 점은 배고픔이나 배부름을 잘 느끼지 못하고 소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배탈이…

One Comment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