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티 파이선과 성배 (10/10)

몬티 파이선과 성배 (10/10)

1975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그러니까 무려 45년 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보는 내내 경이로울 정도로 신선하고 재밌었다.

어쩌면 올해 내가 본 영화 중에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고 가장 뛰어난 작품일 지도 모르겠다.

몬티 파이선과 성배 (10/10)

영상이 나오기 전부터 심상치 않았다. 여름 휴가는 스웨덴이 좋겠다, 무스가 7만 마리가 등장했다는 등 자막에 장난질을 시작하더니만 말 타는 흉내를 내며 어리숙한 아서왕이 등장하자 마자 나는 잠이 확 깼다.

45년 전의 작품이니 서사의 전개나 스토리가 현대 영화에 비해 느리거나 단순할 법 한데, 그런 이질감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연극이나 오페라, 책에서 빌려온 듯한 장과 막의 구조에 뒤섞인 애니메이션과 이미지의 콜라주도 매우 잘 어울렸다. CG의 수준은 낮지만 그 역시 영화의 특이한 구성과 맞물려 우습지 않게 보였다.

내게 이 영화가 특히 재밌었던 점은 사람들의 고정 관념에 대해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고 그에 반하는 반전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광기, 일반적인 것과 특이한 것의 이분법을 끊임없이 붕괴시키며 스토리를 이어갔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흑기사는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려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흑기사는 패배한 것인가? 승리와 패배는 어떻게 다를까?

브리튼을 대표하는 아서왕이라는 소개에 농노들은 권력은 민중이 위임하는 것이고 자신들은 자치주의 콤뮌을 이뤄 과반의 합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중세가 영주와 농노로만 구성된 사회가 아니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들렸다.

멀쩡한 결혼식장을 피바다로 만든 기사 랜슬럿을 보라. 탑에 갇혀 있으니 구해달라는 메세지를 받고서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베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상식이 얼마나 위험한 것으로 바뀔 수 있는 지 경고하는 듯 하다. 심지어 랜슬럿은 그가 당연히 공주였을거라고 이야기했다.

기사들을 한 순간에 해치우는 전설적인 괴물의 정체는 흰 털에 큰 귀를 갖고 폴짝 폴짝 뛰어다니는 작은 토끼였다. 기사단은 괴물의 정체가 드러나자 어이없는 비웃음과 함께 총공격을 감행하지만 토끼의 공격에 순식간에 괴멸당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무엇인가.

이런 물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반복되어 마침내 영화 자체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체포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인지 아닌지 되묻는 것인가라고 의심하며 ‘여기서 끝나면 딱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소름끼치게 완벽한 작품이었다.

Similar Posts

  • 루팡3세. 더 퍼스트 (9/10)

    루팡은, 최고다. 블로그에는 하나의 글 – 루팡3세 – 안개의 일루시브, 세븐데이즈 랩소디 (5/5)-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루팡 3세는 한 두편의 극장판을 제외하면 거의 다 봤다. 3D로는 처음 보는 작품인데 재미는 있었지만 역시 2D가 주는 우스꽝스런 구성은 따라가지 못한다. 공각기동대를 비롯 대부분의 애니메이션들은 3D보다는 2D가 좋았다. 오랜만의 휴가. 코로나 덕분에 하드 보일드 소설이며 애니메이션이며 평소에 느긋하게…

  • 적벽대전2, Red Cliff 2 (7/10)

    http://www.imdb.com/title/tt1326972 이야기를 전달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이다.영화가 가지는 고도의 상업성을 유지하면서 감독 자신의 목소리와 철학을 담아내는 좋은 타협안이 바로 이러한 ‘연작 체제’가 아닐까?삼국지 연의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적벽대전을 통해서 위/촉/오를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2부작이 완료되었다.완성도가 떨어지지 않음에도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삼국지 본래의 텍스트가 지닌 상상력이 워낙에 큰…

  • 퀀텀 오브 솔러스 (8/10)

    http://www.imdb.com/title/tt0830515 로저무어는 폭력적이어서 싫다지만 난 이 새로운 007의 생생함이 너무 맘에 든다.다니엘 크레이그는 바람둥이에 농담꾼인 007의 이미지(이것도 물론 나쁘진 않다!)를 신경질적이고 사나운 이리같이 변신시켰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아주 적절한 변화이다.전작 카지노 로얄에 이어  이전에 없던 007이기 때문이다.특히나 도입부의 추격 시퀀스에서 낯 익은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이 제이슨 본의 이미지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제이슨 본, 그 진짜 첩보원.자동차가…

  • 논스톱 (7/10)

    관객을 몰입시켰던 여러 장치(끊임없는 메세지, 기장의 죽음 등)들이 그냥 묻어두고 가기에는 비중이 매우 컸던지라, 관객이 떠올릴 테러리스트의 모습이 매우 초라해지고 말았다.150명을 폭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테러리스트가 기내 어딘가에 몰래 숨어서 문자를 보낸다거나 누구도 모르게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숨을 졸인다던가 하는 상상만으로도 뭔가 우스워 진다. 관련된 글: 데스 위시 (5/10) 더 포리너 (7/10) 투건즈 (6/10) 스펜서 컨피덴셜…

  • 문라이트 – 껍데기는 가라 (8/10)

    세 개의 이름, 한 사람의 생 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Moonlight, 2016)는 마이애미의 가난한 흑인 동네에서 자란 한 소년의 성장기를 세 개의 장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리틀’, 청소년기의 ‘샤이런’, 그리고 성인이 된 ‘블랙’. 이름이 세 번 바뀐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 샤이런은 한 번도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불려본 적이 없다. 이 영화와…

  • 무명 (Hidden Blade, 2023) (7/10)

    무명 (Hidden Blade, 2023) 양조위의 얼굴에 이끌려 시작한 영화였다. 그런데 막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머릿속에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왕이보였다. 젊고 잘 생겼다. 그러나 양조위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영상미만큼은 타협이 없다 이 작품의 가장 큰 강점은 단연 영상미다. 배우들의 얼굴을 따라 굴곡지는 섬세한 조명,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는 꽉 찬 구도. 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