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보살 — 비빔밥처럼 버무려진 한국의 지금

월남보살 — 비빔밥처럼 버무려진 한국의 지금

월남보살 — 비빔밥처럼 버무려진 한국의 지금

미장센단편영화제 상영작을 하나씩 보다가, 예상치 못한 작품에 발이 묶였다. 김근호 감독의 ‘월남보살’이다.

베트남 엄마와 한국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고등학생이 신병(神病)에 걸렸는데, 몸에 자꾸 외국 신이 내려 무당이 내림굿을 거절한다. 엄마와 베트남으로 건너가 베트남 신을 받으라고 하는 아빠. 한국에서 나고 평생을 한국에서 살았는데? 결국 친한 친구들과 함께 직접 내림굿을 진행한다는 이야기.

도입부터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놀라움이 겹쳐 쌓였다. 시놉시스, 촬영, 특수효과, 대사, 미장센.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대목이 없다. 단편이라는 형식의 한계를 의식하지 못할 만큼, 밀도가 촘촘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지금 한국의 풍경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담아냈다는 데 있다. 이미 다민족 국가가 된 한국. 그리고 영화 속 친구들은 혼혈인 주인공에게 어떤 차별도 편견도 없다. 오히려 친구를 위해 내림굿 방법을 AI로 검색하고, 함께 굿판을 차린다. 여기서도 네이버 대신 AI를 활용하는 요즘 세대의 모습도 슬쩍 끼어든다. 굿상 위에 망고와 사과가 나란히 놓이고, 부채 대신 손풍기를 든 모습에서는 피식 웃음이 터진다. 이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흘려보내기 아까울 정도로 정확하다.

폭소가 터진 건 내림 신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베트남 신과 한국 신이 번갈아 나타나는 그 장면은, 유머로 포장돼 있지만 사실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기도 하다. 사춘기 청소년의 혼란. 그 혼란이 단순한 성장통이 아니라, 두 나라 사이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묻는 정체성의 혼란과 겹쳐 있다는 것. 감독은 이 무거운 주제를 무겁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웃음 속에 슬쩍 녹여 넣어, 웃고 나서야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든다.

비빔밥이라는 말이 딱 맞다. 다민족 사회, AI 세대, 무속 신앙, 혼혈 정체성, 청소년의 방황. 이 많은 재료들이 따로 놀지 않고 한 그릇 안에 잘 비벼져 있다. 억지스럽지 않게, 맛있게.

김근호 감독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


“미쟝센 단편영화제(Mise-en-scène Short Film Festival, MSFF)”는 2002년 이현승,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등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국내 유일의 장르 경쟁 단편영화제다. 사회적 관점, 멜로, 코미디, 공포·판타지, 액션·스릴러 등 장르별로 섹션을 나눠 경쟁하며, 엄숙주의를 거부하고 새로운 상상력과 ‘발칙함’을 존중하는 것이 이 영화제의 정체성이다. 나홍진, 조성희, 엄태화, 장재현 등 지금의 한국 영화를 이끄는 감독들이 이 영화제를 거쳐 갔다. 2026년 현재 제22회를 맞이하고 있다.

Similar Posts

  • 똥개 (5/10)

    박진감 넘치는 오토바이 추격씬. 🙂 ‘남자영화’를 만들겠다, ‘똥개’에 대한 곽경택 감독의 얘기가 기억난다.‘남자 영화’라는 표현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자. 남자 영화는 남자가 보는 영화인가. 남자영화는 남자와 관련한 어떤 주제를 가지고 있나. 남자영화는(이런 대칭구조가 있다면) 여자영화와는 어떻게 다른가. 혹은 일반영화와는 어떻게 다른가. 대체 남자영화는 무엇인가?친구에 이어서 똥개.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로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추억이라고…

  • 연인 (aka. 十面埋伏, House of flying Daggers) (9/10)

    http://www.imdb.com/title/tt0385004/ 장예모 감독은 매염방의 급작스런 죽음 때문에 시나리오를 다시 썼습니다.또한 장예모와 매염방은 엔딩 장면에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넣을 예정이었으나, 죽음이 너무 빨리 와버린 탓에 추모 자막으로 대신했다고 합니다.매염방. 좋은 배우였습니다. 다시, 십면매복으로 돌아와서.0. 중국제목은 십면매복입니다.그렇다면 이 영화를 무협’멜로’라고 선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랑에 포인트를 맞춘 관객들은 정작 중요한 장면,장면에서 폭소를 터뜨리기 일수입니다.사방에 적이 있으며, 그들은…

  • 사생결단 (Bloody tie) (7/10)

    related imdb : http://www.imdb.com/title/tt0816437/매우 깔끔한 느와르. IMF를 배경으로 삼는 치밀한 구성부터 끝까지 갈등의 끈을 풀지 않는 알레고리까지, 모두 인상적이다.ps. 황정민과 류승범의 열연은 돋보인다. 덧붙여 그들의 사투리도. 관련된 글: 효자동 이발사 (7/10) Sin city (9/10) Fever Pitch (6/10) 한반도 (2/10) 사우스 포 (7/10) 브레이킹 배드 (breaking bad) (10/10) 헌트 (2/10) 윤희에게 (10/10)

  • 선생 김봉두 (8/10)

    선생 김봉두는 명작은 아니지만 좋은 영화이다. (좀 짜게 굴자면) 그저그런 내러티브에 적당한 문제의식을 버무린 반쪽짜리 영화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만큼 허술한 면이 많지만, 그러한 단점들은 생동감 넘치는 디테일과 관객의 감성코드를 자극하는 에피소드들로 충분히 커버되고 남는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기억의 조각들 – 가족(혹은 아버지)에 대한 회한, 선생님에 대한 동경과 추억, 외교관이 되고 싶다거나 야구선수가 되고 싶은…

  • 록키 발보아 (6/10)

    http://www.imdb.com/title/tt0479143 20자평 : 말라 바스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 관련된 글: 사우스 포 (7/10) Felon (8/10) 스타쉽트루퍼스 3 (1/10) 화피, Painted Skin (6/10) 방콕 데인저러스 (2/10) 이글 아이 (8/10) 세븐데이즈 (9/10)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