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고 절망하는 모든 삶을 비추는 따스한 불빛

견디고 절망하는 모든 삶을 비추는 따스한 불빛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견디고 절망하는 모든 삶을 비추는 따스한 불빛

책장을 덮으면서 작은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읽은 이야기들에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결말과 따뜻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죠.

우리가 잠시도 참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열어보는 휴대폰 속 세상에는 한끼에 몇 십 만원을 아무렇지 않게 지불하는 화려하고 빛나는 과시적 일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은영 작가가 집중해서 바라보고 관찰한 일상은 그와 달리 온통 무채색이고 하루 하루 그저 사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어려워 좌절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의 아픔을 내보이거나 도움을 요청하기는 커녕 몹쓸 흉이라도 되는 양 숨기고 모른 척 하고 외면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최면을 걸어 도피하기도 하죠.

그들에게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힘들어 하셔도 된다고. 당신이 보여주는‘아주 작은 빛으로도’이 세상이 빛난다고. 그리고 우리의 삶은 이런 ‘아주 작은 빛으로도’살아갈 만하다고.

이 소설집에는 7개의 단편 소설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작품은 다른 사회적 편견과 상황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여성 혹은 여성에게 더 잔혹하게 강요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려낸 많은 인물과 이야기는 우리도 한두번은 겪었거나 들어 봤음직하고 심지어 어떤 인물은 바로 내 과거이거나 현재인 듯 빼어난 현실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약자에게 더 잔인한 우리 사회의 모습. 그 일그러진 거대한 사회적 왜곡을 작품의 뼈대로 재구성한 후 섬세하고 세밀한 문장을 통해 읽는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같이 쳐다보고 인식하자고 부드럽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최은영 작가가 많은 노력 끝에 우리 손에 쥐어준 아픈 현실적 문제는 여러가지 실재의 사건들과 잘 엮여서 더욱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가부장제의 위압, 성적인 학대와 상처(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답신, 이모에게), 극심해지는 빈부 격차(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비정규직의 고용 불안정과 취업의 어려움(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일년).

그런데 이 문제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 아주 큰 영향을 주지만 대부분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 치환되어 사회적 지원이나 안전망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2009년 용산에서 발생한 철거 현장 화재 사건과 그 참사의 원인을 불법적인 폭력 시위로 돌리려고 한다거나(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를 괴롭힌다거나(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진보적인 학생 운동을 하면서도 자기보다 뛰어난 여성을 희화하거나(몫) 장기적인 폭행을 못 견뎌 남편을 살해한 여자를 쌍방 폭력으로 몰아가거나(몫) 정규직 직원의 실수를 인턴 사원이 밤새 수습한다거나(일년)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선생님이자 남편을 ‘그래도 애한테는 잘한다’고 감싸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당신).

우리에게 ‘오징어 게임’은 한국의 위상을 세계로 과시하는 K콘텐츠의 대표 드라마가 아니라 오늘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탈락하면 죽어 나가는’ 무한 생존 경쟁의 현실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은영 작가는 이런 각박한 현실을 더욱 버겁게 만드는 사회적 편견을 아주 잘 포착했고 실제로 사람들을 절망으로 밀어넣는 것은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다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소설집이 빛나는 이유는 작품의 절망적인 현실 속에 그래도 마음을 따뜻하게 뉠 수 있는 여운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작가는 그것이 우리 삶의 희망이자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부딪치고 상처를 주고받는 많은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화해하고 등을 기대고 몸을 맞댑니다.

여스승과 여제자로 만났지만 여자라고 무례한 사람들에게 같이 저항하기도 하고(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사춘기 딸과 텃밭을 가꾸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하고 (파종) 일평생 그렇게 닮기 싫었던 이모의 모습이 결국 자신의 얼굴임을 깨닫고 이모의 품에서 잠들기도(이모에게) 합니다, 너무 다정해서 이 사회를 견딜 수 없을까봐 걱정하는 이모(이모에게), 그래서 거리를 두며 멀리하는 딸이지만 그녀의 아들이자 손주는 또 한없이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적 차별이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었던 깊은 우정(일년)도 있고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형부에 맞서다가 수감 생활을 하지만 조카에게는 한없이 깊은 사랑을 베풀기도(답신) 합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갈등이 어떻게든 봉합되는 결말을 보여 주지만 이또한 개인적인 깨달음과 노력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어쨌거나 불만스러웠습니다. 다만 이런 결말 역시 이 사회의 한계를 고려한 것은 아닐까 하는 또다른 고민의 동기가 되기는 했습니다.

소설집의 대미로 어울리는 장면은 ‘이모에게’의 마지막 단락이었습니다.

비행기 조종실에서 바라본 무수히 많은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고, 밤 비행에서 별빛이 보이면 이모의 눈빛이라고 생각하며 어두운 밤에만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믿음이 있다는 구절입니다. 다소 판타지의 느낌을 살린 이 단락은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밝고 환한 이야기였고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한 친구를 얼마나 많이 사귀는가에 있다고 말한 일본의 노작가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친구는 나이와 성별, 취미 같은 것과는 무관하고 얼마나 깊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가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제자와 스승, 정직원과 인턴, 이모와 조카, 할머니와 손주 등 혈연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서로에게 빛이 되어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집이었습니다.

어둡고 힘든 이야기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밝고 희망적인 여운을 더욱 강하게 남겨 주었고 삶은 아직, 그리고 앞으로도 살 만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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