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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허수경

  • yoda 

위를 모두 제거한 후로 식사 후에는 45도 정도 등을 기대어 음식물이 빨리 내려가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재택 근무를 하거나 휴일에는 잘 지키는 편이고 그렇게 천천히 소화시키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컨디션 차이는 꽤 큽니다. 그리고 그 소화 시간에는 정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퍼붓습니다. 불완전한 소화를 돕기 위해 체내의 에너지가 모두 소화 기관으로 쏠리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어제 오후에 침대 쿠션에 기대어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다가 마음 아파하며 설핏 잠이 들었고 곧 잠이 깨면서도 만년동안 그리워하던 사람이 생각난 듯이 마음이 섬뜩해져 눈을 떴습니다.

시의 전문을 옮겨 두고 짧은 감상을 남깁니다.


수수께끼

극장을 나와 우리는 밥집으로 갔네
고개를 숙이고 메이는 목으로 밥을 넘겼네
밥집을 나와 우리는 걸었네
서점은 다 문을 닫았고 맥줏집은 사람들로 가득해서 들어갈 수 없었네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애

차비 있어?
차비는 없었지
이별은?
이별만 있었네

나는 그 후로 우리 가운데 하나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네
사랑했던 순간들의 영화와 밥은 기억나는데
그 얼굴은 봄 무순이 잊어버린 눈(雪)처럼
기억나지 않았네

얼음의 벽 속으로 들어와 기억이 집을 짓기 전에 얼른 지워버렸지
뒷 모습이 기억나면 얼른 눈 위로 떨어지던 빛처럼 잠을 청했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당신이 만년동안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내가 만년동안 당신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붙들고 있었네
먼 여행 도중에 죽을 수도 있을 거야
나와 당신은 어린 꽃을 단 눈 먼 동백처럼 중얼거렸네

노점에 나와있던 강아지들이 낑낑거리는 세월이었네
폐지를 팔던 노인이 리어카를 끌고 지하도를 건너가는 세월이었네
왜 그때 헤어졌지,라고 우리는 만년동안 물었던 것 같네
아직 실감나지 않는 이별이었으나
이별은 이미 만년 전이었어

그때마다 별을 생각했네
그때마다 아침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다리 밑에 사는 거지를 생각했네
수수께끼였어.
당신이라는 수수께끼, 그 살(肉) 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대륙들은
횟빛 산맥을 어린 안개처럼 안고 잠을 잤을까?

관련 글  계절 산문. 박준

북극곰과 산맥과 대륙, 만년, 얼음, 눈. 이 시어들은 거대함을 넘어 위압적이고 차갑고 무감각합니다.

눈이 오던 어느 날, 차비도 없고 같이 갈 서점이나 맥줏집도 여의치 않던 그런 날, 바람처럼 헤어졌던 두 사람은 그 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헤어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애써 얼굴을 잊었고 뒷 모습을 잊었고 그래도 생각이 나면 잠을 청하며 마침내 어느 날엔가는 깨끗이 잊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잊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 시에서 마침표가 찍힌 첫번째 단락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어느 날, 그렇게 마침표를 찍고 보니 알게됐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만년동안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도 그 사람 때문에 만년 동안 울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빙하기의 추위를 견디고 꽃망울을 맺은 동백처럼 아련하고 여리지만 붉게 빛났습니다.

바람처럼, 강아지처럼, 리어카처럼. 평범하고 흔한 이별이었는데 그게 만년 전이었다니. 두 사람에게 헤어짐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가 하면, 만년이라는 시간이 낑낑거리는 강아지나 폐지를 줍는 노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한순간으로 치환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이었습니다.

그게 당신이라는 수수께끼입니다. 그 영원같은 만년의 눈물이 수수께기였고 알 수 없는 헤어짐이 수수께끼였고 기억나지 않는 잊혀진 뒷모습이 수수께끼였습니다. 그 모든 수수께끼 속에 당신이 있고 그리고 내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연시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처절하고 지독하고 긴 그리움이라니요. 무엇을 향한 애틋함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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