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2023) — 빔 벤더스 (8/10)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2023) — 빔 벤더스 (8/10)

사진을 좋아하는 동료가 있다. 취향이 비슷해 이야기를 나누면 늘 즐거운 사람인데, 요즘 재미있게 본 영화를 물었더니 ‘퍼펙트 데이즈’를 꼽았다. 찾아보니 빔 벤더스 감독 작품이다.

빔 벤더스. 전후 독일 사회의 불안을 스크린 위에 사실주의로 새긴 감독, 내가 대학 시절 즐겨 찾던 이름이다. ‘베를린 천사의 시’, ‘파리 텍사스’,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페널티킥을 앞에 둔 골키퍼의 불안’ 그런 그가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이야기를 찍었다.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2023) — 빔 벤더스 (8/10)

보통의 영화는 거창한 스케일이나 웅장한 서사로 관객을 사로잡으려 한다. 하지만 때로는 작은 것들로 더 깊이 흔드는 작품이 있다. 퍼펙트 데이즈는 바로 그런 영화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과묵하다. 그 나이쯤의 남자들은 으레 그렇다. 영화는 오프닝 내내 단 한 마디도 없이 그를 소개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조용히 출근 준비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 낡은 카세트를 틀고 밴 모리슨, 루 리드, 패티 스미스,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들으며 도쿄 거리를 달리는 아침 드라이브. 말 한마디 없이도 우리는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화장실 청소를 그는 최선을 다해 해낸다. 공원에 들러 샌드위치를 먹고 필름 카메라로 나뭇잎 사이 빛을 찍는다. 남길 사진과 찢을 사진에 대한 기준은 가차없다. 가끔 눈에 띄는 나무 새순은 집으로 가져와 작은 화분에 옮겨 심는다. 저녁이면 단골 식당에서 밥을 먹고, 목욕탕에서 몸을 녹이고, 잠들기 전 책을 읽는다. 이 평범한 하루가 평화롭고, 흔들림이 없고, 영원히 계속되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처럼 매력적이다.

물론 그의 일상이 늘 고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게으르고 사랑에 빠진 동료 다카시, 조카 니코, 예기치 못한 여동생과의 재회, 공원의 노숙인과의 기묘한 교류가 히라야마의 루틴을 조금씩 흔든다. 그때마다 야쿠쇼 코지의 얼굴은 말 대신 모든 것을 전한다. 고개를 살짝 젓는 것만으로 눈물이 나오게 만드는 배우다.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은 당연한 결과였다.

촬영도 빼놓을 수 없다. 도쿄의 골목과 공원, 히라야마가 정성껏 닦는 화장실 안의 빛까지, 프란츠 루스티히의 카메라는 자연광 속에서 아름다움을 건져 올린다. 매일 밤 꿈 시퀀스가 하루의 끝을 부드럽게 감싸며, 어제와 오늘이 미묘하게 다른 무게로 쌓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년이란 삶보다 죽음이 가까운 시간이다. 무언가를 이루려 애쓰기보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고 알아채는 것으로 충분한 나이. 히라야마의 하루하루가 바로 그렇다. 중년의 남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삶이다.

카세트가 끝나갈 무렵 잡히는 야쿠쇼의 클로즈업, 그 표정 하나로 이 영화는 완성된다.

10점 만점에 11점.

Similar Posts

  • 화피, Painted Skin (6/10)

    http://www.imdb.com/title/tt1055300영웅 본색과 천장지구, 천녀유혼.매력 넘치는 홍콩 영화를 본 기억은 아득하다.구미호와 뭐가 다를까 궁금했는데, 다른 게 없어서 실망.차라리 하얀 여우와 도마뱀이었다면 인간의 마음을 얻기가 더욱 쉬웠을 것을. 관련된 글: Mr.로빈 꼬시기 (4/10) 거룩한 계보 (4/10) 블러드 다이아몬드 (blood diamond) (9/10) 허니와 클로버 (Hachimitsu to Clover) (2/10) 아내가 결혼했다. (6/10) 미인도 (7/10) 잘 알지도 못하면서 (9/10) 논스톱…

  • 혈의 누 (7/10)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낯익음.그 익숙함 때문에 영화의 별점 한개를 뺐습니다. 이 영화는천주교가 전파되고 실학이 발돋움하는, 유럽으로 치면 르네상스나 게몽주의의 시대를 떠올리게 만듭니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이성적인 폭력에 회생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만듭니다만, 이것이 결코 옛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데에 시사점이 있겠지요.영화관 입구에는임산부나 노약자의 관람을 자제해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만그것은 기우입니다.탄탄한 플롯, 주연과 조연의 안정된 연기, 약하지 않은 반전 등좋은 영화의…

  • X-Men: The Last Stand (5/10)

    related imdb : http://www.imdb.com/title/tt0376994/“특수효과의 사용과 기법에 대한 이해” 정도의 강의에 어울릴 법한, 적절하고 잘 조화된 특수효과 이외에는 건질 게 없는 영화. 전작에서 강한 개성을 드러내던 여러 캐릭터는 대상 조차 알 수 없는 미국식 영웅주의에 함몰되어 스러져 버렸고 각 캐릭터의 대사는 무의미하고 공허한 외침으로 메아리칠 뿐이다. 브라이언 싱어의 수퍼맨을 기다려 본다. 관련된 글: 첫 키스만 50번째…

  • Face (2/10)

    영화 정보 : http://www.lostface.co.kr/좋은 소재였으나, 아쉬운 점 1. 귀신이 등장할 필요가 없습니다.당연히 ‘양들의 침묵’류의 범죄 스릴러로 꾸며갔어야지요.해골로 얼굴을 복원한다는 이 생생하고 흥미진진한 소재로 말입니다. 2. 반전이나 복선이 약합니다.제 경우는 송윤아 등장씬부터 아래의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송윤아… 브루스윌리스 아니야…’ 3. 종결도 물론 어색합니다.‘선배님, 제겐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어요’귀신의 유언이라니, 최악. 관련된 글: 춤추는 대수사선 2 (8/10) 인크레더블…

  • 남한산성 (6/10)

    내 점수: 6.5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김훈 특유의 댓구형 문장이 주는 사색과 질문들을 영상으로 제대로 담아 전달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영화를 보고나면 조선의 사대부들이 얼마나 멍청했나 정도가 떠오를 뿐이고 원작 소설이 주려했던 많은 선택과 갈등의 시간은 그리 기억나지 않는다. 관련된 글: 엘프 (6/10) 밤과 낮 – 홍상수 (9/10) 퀸즈 갬빗 (9/10) 말모이…

  • 더 퍼스트 슬램덩크 (10/10)

    슬램덩크를 재미있게 보셨다면 추천합니다. 다케히꼬 이노우에. 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이노우에가 얼마나 뛰어난 아티스트인지 보여주는 장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해변에 와 부서지는 파도의 거품, 해가 넘어가는 황혼의 구름, 턱을 타고 떨어지는 땀방울, 77-76 1점차로 역전한 후 무음으로 일관하는 긴 시퀀스, 움직이는 수채화를 보는 듯한 동화, 특히 더 돋보인 부드러운 움직임, 배경음악 등등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