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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

지난 주 네가 전해준 의외의 소식은 주말 내내 나를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작년 언젠가 논현역 어디쯤을 나란히 걷던 기억. 동남아시아 IT 인력의 효율성과 조선일보에 나왔다던 서울 밤의 지나치게 밝은 조도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기억 말이야. 그리고 널 마중 나온 남편과 조카들. 특히 조카들의 밝은 표정과 눈빛에서 네가 얼마나 좋은 엄마일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단다.

그 기억과 네 발병 소식이 뒤섞여, 그렇게 좋은 엄마이고 아끼는 후배인 J가 느끼고 있을 압박이나 두려움 같은 것에 대해 이렇게 손 놓고 있어도 될까, 북해도의 불꺼진 숙소에서 이런 저런 문장을 스마트폰에 끄적이곤 했었어.

두서 없고 독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나고 보니 도움이 됐던 몇개의 단상을 전한다.

괜찮을 거야라는 단순한 위로가 힘이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미 몇차례 겪은 나는) 좀 더 솔직하게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병이 무서운 까닭은 ‘알면서도 막을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야. 5년 생존율이 90%가 넘어간다고 해도 남은 10%에 누가 포함될 지 모르니까. 그리고 5년 안에 재발하거나 원격 전이가 발생하면 생존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니까.

물론 비약적으로 발달하는 의학 덕분에 대다수의 환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견디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도 말고 너무 우습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충분히 극복할 수 있지만 방심하지 않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해. 그러자면 이 병에 대해서 J는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고 비과학적인 치료법이나 체계적이지 않은 조언은 과감히 무시할 수도 있어야 해.

그리고 투병과 관련한 모든 질문과 조언, 섭생은 물론 부가적인 치료까지도 항상 주치의와 상담하고 논의하기를 바래. 그들에게 우리는 백명 천명의 환자 중 하나이지만 우리한테는 유일한 의사이니까. 그리고 주치의와 이야기할 때는 항상 보호자(남편)을 곁에 두고 메모하는 것도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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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슬프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두렵고. 이런 감정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거라고 하더라. 심지어 아직도 나는 그런 격한 감정에 휩쓸릴 때가 많아. 받아들여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의 진폭도 줄어들터이니 스스로에게 너무 박하게 굴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힘든 감정을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을텐데 받아줄 수 있는 상대라면 조금씩 털어놓는 것도 괜찮다. 나는 가끔 사촌누나에게 ‘아, 누나, 사는 게 좀 힘드네. 하하’라고 농담반 진담반 이야기하곤 해.

아이들

아마 아이들 걱정이 가장 크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내가 없어도 우리 아이들은 잘 클거야’라는 가정이자 진실을 받아들이면 좋을 거야.

신영복 선생의 책에 이런 글귀가 있어.

“꽃과 나비는 부모가 돌보지 않아도 저렇게 아름답게 자라지 않느냐.” 어린 아들에게 이 말을 유언으로 안기고 돌아가신 분이 있습니다. 

처음처럼. 신영복

그리고 내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김남주 시인은 이런 시를 썼어.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밤처럼
서로 속삭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김남주

J야. 이미 우리 아이들은 아름다운 꽃과 나비이고, 우리가 없어도 이 세상은 계속 빛날 거야. 야속하지만 그걸 받아 들인다면 아이들과의 관계와 세상과의 교감은 더 깊어지고 좋아질게다.

투병

아이러니하지만 수술 전까지 체력을 최대한 올려두는게 좋아.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 단백질 섭취, 긍정적인 태도 같은 것들 말이야.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수술 이후에도 마찬가지이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많이 움직이고 걸어야 회복도 빨라진다. 신체는 아마 고통과 비례하는 자정 작용 같은 것들이 있는 지 힘들어도 노력하면 그만큼 따라오더라. 절제 수술 이후에는 팔의 가동성이 현저히 떨어지니까 재활 훈련도 열심히 해야해. 우리 어머님이 같은 수술을 받으셨는데 재활을 게을리 하셔서 후유증이 좀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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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서의 법화경

J는 기독교 신자였던가? 맹목적인 추종 대신 자신을 정갈하게 위로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종교라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나는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마음의 어지러움을 달래기 위해 읽었던 법화경은 꽤 도움이 됐거든. 삶은 유한하고 인간은 고통받을 수 밖에 없으니까 그 불완전함을 수용하면서 삶의 방향도 많이 바뀌었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까, 잘 살까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루를 살더라도) 더 가치있는 생을 살 것인가라는 방향으로 말이야. 봉사 활동을 시작한 계기이기도 하고.

J에게

J야.

맥락도 없고 산만하지만, 그리고 혼란하고 심란한 네게는 너무 야박한 말들인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도움이 되는 말들을 전해주고 싶었어. 아무쪼록 힘든 시간들 잘 견뎌내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그야말로 언제든) 편히 연락하기 바란다.

씩씩하게 이겨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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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의 2개의 댓글

  1. 어제 저녁 9시쯤, 이 글을 손보다가 장폐색으로 의심되는 극심한 복통이 왔습니다.
    119를 불렀고 응급실에 가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채혈을 하고 수액을 맞고 엑스레이을 찍고 콧줄이라 부르는 비위관을 삽입했습니다.
    물 포함 금식.
    아, 이 끔찍한 후유증이 다시 생긴 걸까? 하던 차에 복통이 조금씩 가라앉고 가스도 나왔습니다.

    CT 촬영 결과 장폐색은 아닌 것으로 진단되어 새벽 두시쯤 귀가했습니다.
    힘든 하루였습니다.

    1. 힘들었다는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빠른 회복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건강하실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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