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따뜻한 겨울 바다.

거제, 따뜻한 겨울 바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 가장 큰 힘이 되주었던 친구이자, 선배이자, 형인, 옥세진.
그 형이 살고 있는
그리고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내려가야겠다고 맘 먹었던
거제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겨울바다, 그것도 남해의…
결혼식에도 찾아가지 못했던 불충이 어떻게인들 지워지겠으랴마는
힘들게 고른 선물(비키의 추천으로 전동칫솔을 샀는데, 신혼에 잘 들어맞는 선물이다)을 사들고 맘이 설레이기 시작한다….

■ 첫째날

12/12 pm.09:00
1년간 한팀에서 지지고 볶던 오정아씨의 퇴사를 환송하고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한팀에 합류하게된 정혜경씨를 환영하며
간단한 회식을 가졌다.
아래는 1년간 숱한 유행어를 남기며 광고와 제휴프로그램을 완벽하게 진행해왔던, 그러나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는 오정아 사원. (클릭, 큰사진)

12/12 pm. 10:20
고현행 심야 우등 버스에 오르다.
12/12 pm. 10:30
냉정과 열정사이. blue를 꺼내 읽다.
이미 들어간 술기운의 탓인가, 아니며 그새 에쿠니 가오리의 모래같은 문체에 익숙해진 것인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2/12 pm. 10:50
책을 덮고 잠을 청하다. mp3 player를 꺼내 랜던 셔플모드에 맞춘다.
첫곡은 공각기동대 OST Inner Universe.

■ 둘째날

12/12 am. 01:40
어디쯤일까.
차창 밖으로 스치는 산들의 실루엣이, 마치 강물처럼 부드럽다.
남도의 산들은 영동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산의 실루엣은, 무엇을 닮아가는 것일까?
12/12 am. 01:50
사천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다.
12/12 am. 01:55
PDA를 꺼내 메모를 시작한다. 버스는 국도를 타고 계속 어디론가..
12/12 am. 02:50
고현 버스 터미널.
서울에서 4시간 30분 만에 남쪽 끝까지 .
출발했던 서울은 제법 추운 날씨였는데, 이곳은 훈훈하다 싶을 정도.
12/12 am. 03:20
소동 고개까지 택시로 이동. 소동고개는 대관련 못지않다.
12/12 am. 05:00
두런두런.
딱히 의미가 있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이야기는 그칠 줄 모른다.
형의 첫인사 : 너, 귀걸이도 했냐
나의 첫인사 : 형, 얼굴 좋아졌는데
귀에 구멍을 낸 것이 잘 기억나지도 않는 몇년쯤 전의 일이고 보면,
마주 앉아있는 형과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세월이 끼어있는 것이다.
내일을 기원하고 잠자리에 들다.
12/12 am. 11:00
여독 탓이었을까? 늦잠을 자고 말았다. 형도, 형수도 보이질 않는다.
텅빈 아파트에서 세수를 하고 베란다를 내다본다.
오호! 베란다에서 바다가 보인다!

12/12 pm. 1:00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챙겨먹고, 거제 드라이브에 나서다.
무엇에 쓰는 배일까?

학동 몽돌 해수욕장
거제에는 백사장 해수욕장이 몇 없다고 하는데.
모래 대신에, 몽돌이라 불리우는 조그만 자갈들이 가득한 해수욕장이다.
놀랍게도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질 때면, 자갈 구르는 소리가 해변에 가득하다.
챠르르르 하는, 조약돌 구르는 소리.
아름다운 소리다.
몽돌 해수욕장의 돌 구르는 소리는,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감동적이다.

학동 몽돌 해수욕장의 맑은 바다와 하얀 포말.

도장포의 해금강
거제의 바다는, 보는 것처럼 따뜻하다.
같은 바람이 불어도 어깨가 움츠려 들지 않는다. 도시는 사람을 주눅들게 만든다.

매물도와 대매물도가 보이는 언덕에서 한 컷.

녹색고동.
서울의 그것과는 달리 크고, 녹색을 띄고 있다. 무엇보다 다른 점은 싱싱하고 맛있다는 것.
3,000원짜리 한봉지를 둘이 나란히 앉아 경쟁적으로 까먹었다.

거제, 따뜻한 겨울 바다.

띠들판. (회전목마 오프닝에 등장하는 녹색등대가 바로 이 곳)

여차 몽돌 해수욕장
맥주거품 처럼 부드러운 포말, 포말, 포말…
여차 해수욕장엔 지난 태풍의 피해로 몽돌이 많이 줄었다.

여차 해수욕장, 해가 지려하고 있다.

여차의 언덕에서 바로본 남해 바다.
좌측 끝으로 가면 부산, 우측 끝으로 가면 제주도.
정중앙으로 계속 가면?

하늘 빛, 물 빛. 서로를 닮은 거대한 자연.

여차 언덕 – 일조 전의 황금빛 태양.

거제의 남단을 두루 둘러보고, 어느 덧 저녁이 되었다.
자연산 횟감을 한접시 뜨고, 집으로 돌아와 소주를 일잔한다.

소주를 다 마시고, 폭탄주를 슬슬… -_-;
노조설립에 관한 얘기가 예리하게 날 찔러온다.

세진형과 승리의 V.
형은 내게 프랑스 유학을 권했는데, 이모저모 공감하는 얘기였다.
무슨 공부를 할 것인가? 미학? 사회학? 아니면, 그림?

🙂

■ 셋째날

12/13 pm. 01:00
느즈막히 아침을 먹고 나오다.
포로수용소는 다음에 들르기로 하고 집으로 향한다.
그 와중에 형님은 미역과 멸치를 챙겨 준다. …고맙다.
12/13 pm. 06:00
남부터미널.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답답한 기분에 맘이 상한다.
서울,은 날 슬프게 그리고 멍청하게 만드는 도시다.

Similar Posts

  •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편적인 가치

    두어달 전 부터 건담 애니메이션을 시대별로 이어보는 중이다. 20여년간 만들어진 모든 작품을 모아 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아서 가끔은 주의력을 잃고 틀어놓기만 할 때도 많다. 역시나 초회차 작품이 보기 좋았는데, 옛날 방식의 거친 셀 애니메이션이 추억을 살려주었고 감독의 반전 의도도 잘 섞였다고 생각한다. 뒤이은 몇편의 시리즈에서는 발전적인 면도 있으나 심하게 잔인한 경우도 많고 유머와 진지함을 마구…

  • |

    배부른 사자처럼

    요즘 산책을 할 때는 음악 대신 오디오북을 듣는다. 명상에 관한 책이다. 쿤달리니, 차크라, 경혈, 우주, 햇빛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중 그래도 선명하게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는 문장이 있었다. 배부른 사자처럼 느긋하게 숨 쉬세요. 미래를 걱정하는 생물은 사람 밖에 없다고 한다. 동물들은 그저 지금, 지금 살아 남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그러니 배부른 사자는 얼마나 느긋하겠는가….

  • 심상정 후보 사퇴를 반대하며.

    나는 심상정 후보의 후보 사퇴를 반대한다.2010년 5월, 한국의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자. 과연 지금 이 땅에 ‘진보’가 설 자리가 있나? ‘진보가 무엇인가?’라는 것은 매우 논란이 큰 주제이나, 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도가 겨우 진보의 가장자리에 서있는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는 민주당을 포함한 나머지 당은 한나라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둘의 구분 기준은 명확하다. 어떤 ‘계급’을 위해서 싸우는가? 2000년…

  • 청춘 지고 철 들다

    확실히 아무 생각 없다. 발렌타인 데이. 관련된 글: 받고 싶은 선물. 퇴근길. 백화점 사진 몇장. 미국 오다. 반성 이상은, someday 2025년을 돌아본다 제주 4.3 항,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 — 화섬노조 역사기행 후기 2026.06.09. 대구 일상

  • 승진의 원천은 무능력?

    사내 인트라넷에 아주 재밌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안분지족을 서양식으로 표현한 걸까요? 🙂 {피터의 원리는 능력과 무능력에 대한 기존 개념을 과감하게 타파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남북전쟁 때 북군의 장군이었던 리처드 테일러는 ‘7일간의 전쟁’에 관해 언급하면서 “남군 지휘자들은 남군의 수도였던 리치몬드시 부근의 지형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몇년전 다리와 건물이 붕괴되는 사고 뒤에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관련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 나는 왜 노동조합에서 일하게 되었을까?

    지난 25년간 웹서비스 기획자로서 해왔던 일들이다. 3월 11일부터 내가 속한 조직은 공식적으로 ‘노동조합’으로 바뀌었고 이제 노동조합에서 할 일들이다. 전혀 다른 일들이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생각보다 재미있다. 어제 선동학교에 가서 1박 2일 교육을 받으며 다른 노조의 간부들을 만나 각자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KCC 노조의 지회장은 타임오프 때문에 두달 넘게 월급이 나오지 않고 있었고, 여수산단 노조는 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