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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슬픔이 나를 깨운다. 황인숙

새벽 해가 뜨는 걸 보고 잠든 하루였다.
작은 방에 있던 컴퓨터를 큰방으로, 큰방에 있던 침대를 작은 방으로 옮겨놓고 나니 날이 훤히 밝았다. (…이렇께 쓰니까 별일 아닌 거 같은데, 어제 밤 11시부터 오늘 새벽 5시까지…)

아무도 없는 집에서
불현듯 내겐 어떤 충동이 생겼던 것이었을까?

리듬이 깨져, 다시 하루 해가 저문 지금도
피곤하다.
눈에 들어오는 시집을 펼쳐든다.
오늘 나를 깨운 건, 슬픔이었나?

슬픔이 나를 깨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으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황인숙.문학과 지성사.2000.

ps. 하루 종일, 말로의 음악을 들었다.
눅눅한 날씨 같은 그녀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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