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다시, 일상으로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왔습니다.

2021년 9월 17일, 정기 추적검사 결과 암이 재발했다는 진단을 받았고 2021년 11월 8일 위암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나마 남아있던 위장마저 모두 제거되어 이제 저는 위가 없습니다. 좋은 점은 위염이 걸리거나 위가 쓰릴 일이 없다는 점이고 나쁜 점은 배고픔이나 배부름을 잘 느끼지 못하고 소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배탈이 자주 나고 많이 아프다는 점입니다.

작년 11월 수술 후 오늘까지 거의 6개월은 휴가와 병가, 휴직을 더해 쉬었습니다. 이제 다시 아침에 회사로 출근해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그 (소중하고) 흔한 일상이 시작됩니다.


이것으로 무려 세번째의 암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몇번째인지도 모를 많고 많은 전신 마취 수술과 치료, 검사, 회복을 겪으며 이겨내는 중입니다.

  • 1997년 2월 결장암: 응급 장루 개복 수술, 결장암 제거 및 장루 복구 개복 수술, 항암 화학 요법, 방사선 치료, 이후 10여 차례의 장폐색으로 긴급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결국 복강경 재수술
  • 2014년 12월 위암 (조기 위암): 위암 제거 복강경 수술 (위장 2/3 제거)
  • 2021년 11월 위암 (8판 기준, 2기 A, T3 N0 M0): 위암 제거 및 위 전절제술 복강경 수술 (위장 모두 제거), 항암 화학 치료의 성과가 불명하여 임상실험 결정 후 화학요법 없이 경과 추척만 하는 비교군에 할당됨.

첫번째 결장암 수술 때는 싱글이었고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해 아주 많은 일을 정말 열심히 하던 시기였습니다. 경과가 위중하여 정신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고 입원 기간도 길어 두달이 넘었습니다. 한겨울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입원했는데 남방을 걸치고 봄 볕 햇살을 받으며 퇴원했으니까요. 기록을 많이 남기지 못했고 그나마도 이젠 사라져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차가운 죽음을 손안에서 느낀 게 처음이라 매우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아직 해보지 않은 일도 많은데 이렇게 죽으면 많이 아쉽겠다, 시간이 좀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감정이 많았습니다.

관련 글  패트릭 스웨이지

두번째 조기 위암 때는 결혼을 이미 했고 아들이 둘 있었고 회사에서도 100여명 규모의 조직장으로 나름 인정을 받으며 성취감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조기 위암은 5년 생존률이 90% 이상인 것을 알고 있어서 다소 가볍게 생각했습니다만, 위 절제로 인한 후유증은 생각보다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유치원생인 아이들의 뒷바라지 걱정이 가장 컸습니다. 혹시라도 여기서 생이 끝나게 되면 우리 아이들이 너무 힘들텐데 하는 걱정 말이죠.

세번째의 위암은 1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2기 A로 급성장한 암이라 걱정이 많았습니다. 입원 전에는 조울증도 있었고 밤마다 악몽을 꾸기도 했고 입원 전 날 식구들과의 식사도 마지막인 것처럼 무거웠습니다. 수술 후에도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애를 썼고 두달이 지나도 여전히 미진한 회복에 몸은 힘들고 마음도 어둡다 못해 칠흑같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세번째의 암은 막상 마주하고 보니 지난 두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무서움이나 두려움은 상대적으로 덜했고 아이들이나 아내, 어머님 등의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걱정도 많이 줄었습니다. 온전히 ‘나’와 나에게 남은 ‘시간’에 집중해야 했고 그것이 앞으로 남은 삶에 대한 방향이 될 것이라 예상되었습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기록을 남기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 눈빛과 목소리를 교환하고 자전거를 타며 경치를 즐기고 무거운 혹은 굳은 내 몸에 집중하고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고 여행을 다니고 요리를 했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적어 봅니다.

  •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그 시간들은 나의 남은 생이 될테니 헛되이 보내지 않겠습니다. 모든 시간을 어떤 일로도 채우겠다는 뜻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인식하며 쓰겠다는 결심입니다.
  • 결국 인생은 ‘사람’을 남기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힘들 때 위로해주면 기쁜 사람들이 주위에 얼마 없었고 기쁠 때 잘됐다고 축하해주고 환호할 사람들이 주위에 얼마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겠습니다.
  • 내 몸에 관심을 더 갖겠습니다. 이 또한 너무 늦었지만 지금부터도 건강하게 보낼 수 있는 몸을 만들겠습니다.
  • etc
관련 글  암 환자와 이야기하는 방법

이제는 남아있는 생은 정말로 덤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다시 만들어보고, 후회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야겠습니다.

“다시, 일상으로”의 2개의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