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어느 토요일.
치아 마모증 치료를 위해 치과에 들렀다. 대기 시간이 길어져 깜빡 잠이 들었다. 이름이 불리우고 치과 의자에 앉았다. 그 의자에 누워있으면 늘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떠 올랐다. 조금씩 다른 날카로운 금속 도구들. 굉음. 나로 동화되는 이물질.
그리고 어제 받은 부고를 따라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상복을 입은 후배는 날 보고 와락 눈물을 흘렸다. 같이 간 후배는 육개장을 뜨며 말했다. 너무 젊은 사진이 걸렸다고. 경조사에도 사이클이 있다고. 한참은 결혼, 그리고 또 한참은 돌, 그리고 이제는 상이라고.
집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였는데 많이 잤다.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아이스 커피에 담긴 얼음이 다 녹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들어와서 ‘하하하’를 보고, ‘다른 나라에서’를 보고, ‘북촌 방향’을 봤다.
- 한 사람의 다양한 이면
- 위선
- 내겐 너무 착하고 똑똑하고 예쁘고 사랑스런 당신
- 도시의 풍경
- 가슴이 드러나지 않는 베드신과 통속적인 연애
- 술
- 모항, 통영, 북촌, 인사동, 종로
- 형
- 네가 그러면 안되지, 새끼야.
- 담배연기
- 과장된 웃음 소리와 유혹의 경계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 영화들이었다.
ps. 송선미의 짜증난 표정은 기억 속 누구를 꼭 닮았다. 놀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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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이 사랑하는 ‘서울의 뒷골목’
서울 삼청동과 가회동을 걷다 보면 외국인 단체 여행객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들이 ‘한국의 어제와 오늘’이라고 소개받을 그곳은 정작 우리에게는 낯선 곳이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혹은 남의 것을 우리 식으로 바꾼 낯선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보이는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외국 여행객들은 ‘가장 한국적인 공간’으로 이해한다.
그 ‘디스플레이된 서울’의 모습이 아닌 진짜 우리의 모습은 어디서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서울 걷기의 고수들을 따라 걸으며 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천년의 기억을 담은 각석을 따라 걸었던 이창현 서울연구원장의 ‘각석 투어’(서울에도 앙코르와트 같은 역사 유적이? 기사 참조)와 남영동 대공분실과 남산 안기부 건물을 찾아 현대사의 아픔을 더듬었던 홍성태 교수(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와의 ‘인권 투어’(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라진 사람들 기사 참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서울의 어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서울의 오늘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복기하며 둘러보았다. 홍 감독은 예전에는 지방에서 영화를 찍곤 했는데 요즘은 서울에서 주로 영화를 찍는다. <우리 선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북촌방향> <옥희의 영화> 등 최근 영화가 다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 영화 속 배경을 눈여겨본 관객이 의외로 많다.
오진이 서울문화재단 경영기획본부장은 <우리 선희>의 배경이 된 주점 ‘아리랑’에 가기 위해 영화에서 나오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다(실제 번호와 달랐다). 서울연구원은 홍상수 감독을 ‘서울 스토리텔링 어워드’ 후보로 추천했다. 영화 속에서 아름답게 그려진 것도, 낭만적으로 묘사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홍상수가 재현한 서울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밥집과 술집은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거나 명사들이 두루 찾는 명소가 아니다. 주로 홍 감독에 의해 재발견된 곳이다. 홍 감독은 주변부를 배회하며 도시를 기웃거린다.
바람 부는 날에 걷는 서울 뒷골목, ‘홍상수 올레’
홍상수 감독은 서울의 뒷골목을 사랑한다. <오! 수정>을 인사동 뒷골목에서, <극장전>을 종로 뒷골목에서 찍은 홍 감독은 요즘은 북촌과 서촌을 배경으로 촬영 중이다. 물론 이전 영화와 마찬가지로 북촌과 서촌의 맛집이나 명소를 담아내지는 않는다. 그냥 그 골목을 배회하다 우연히 들어갈 것 같은 밥집과 술집이 영화의 배경으로 사용된다.
홍상수 영화의 장소는 소풍을 가거나 데이트할 때처럼 들떠서 가기보다 회사에서 구조조정당하거나 좋지 않은 결과를 통보받고 찾아갈 만한 곳이다. 삶의 씁쓸함을 느끼고 혼자 감상에 빠지기 좋은 공간이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공원 벤치나 공중화장실은 그런 ‘불안정한 한가로움’을 맛보기에 적합한 곳이다. 한가로운 벤치에서 공중화장실에 간 동반자를 기다리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홍상수 영화 주인공의 모습이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공원이나 궁궐은 휴일보다 평일에 가는 것이 영화의 정서를 느끼는 데 더 적합하다. 평일의 공원, 특히 관광객이 찾지 않는 한적한 공원은 마치 꾀병을 부리고 결석했다가 부모님 몰래 빠져나와 동네를 헤매고 다닐 때처럼 일탈의 느낌을 준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배경으로 나온, 빛바랜 신사임당상과 이율곡상이 있는 사직공원은 그런 느낌을 받기에 제격인 곳이다.
반주로 소주를 마셔야 할 것 같은 밥집, 얘기하다 싸움이 날 것 같은 술집, 이런 밥집과 술집이 홍상수 영화에 주로 등장한다. 지인들과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데 홍 감독 영화의 배경으로 나오는 술집과 밥집 중 특히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곳을 갈 때는 한 가지 유념할 점이 있다. 그곳에 갔던 사람들 중에 ‘난 당신 같은 뜨내기는 관심 없다’는 주인의 표정을 읽어낸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그 씁쓸함까지 즐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전해볼 일이다.
영화 때문에 ‘치킨을 시켜먹어야 할 술집’으로 떠오른 ‘아리랑’의 여주인은 문의 전화에 “술 마시려면 저녁은 먹고 오세요”라고 응수했다. 와서 치킨을 시켜달라는 손님이 많은 눈치였다. 홍상수 감독이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자주 가는 단골집은 정해져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홍 감독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김의성씨는 “한식당 다정과 주점 소설을 자주 가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두 곳 모두 문화예술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북촌방향>의 무대였던 주점 ‘소설’에 소설가 고종석씨를 앞세우고 간 적이 있다. 주로 중장년층 손님이 많았는데 무리와 무리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합쳐졌다.
<오! 수정>과 <북촌방향>에 등장한, 임연수구이가 유명한 ‘전봇대집’이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나온, 닭볶음탕이 맛있어 보였던 ‘원창식당’은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원창식당 옆의 청국장집도 맛집으로 유명하다. 원창식당 주인아주머니는 영화 출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영화 이야기를 꺼내면 기분 좋게 촬영 당시 이야기로 수다를 떨고 서비스 반찬도 가져다준다. “우리는 조미료를 안 넣는 식당이에요. 원래 홍상수 감독의 프로듀서가 단골이에요. 영화 개봉하고 손님이 늘었는데, <우리 선희>가 개봉하면서 영화발이 떨어졌는지 손님이 줄었어요”라고 말했다.
원창식당에서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사직동 그가게’는 짜이(밀크티)로 유명한 곳이다.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짜이를 마실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짜이를 직접 만들어본 사람은 그 맛을 제대로 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조금만 묽게 타면 밍밍하고 조금만 진하게 타면 맛이 틀어진다. ‘사직동 그가게’는 우리 입맛에 잘 맞는 짜이를 만드는데, 인도 남부의 디저트인 ‘도사’를 곁들여 마시면 일품이다.
서촌은 이런 조그만 문화 아지트가 꾸준히 들어서는 곳이어서 두리번거리는 재미가 있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주인공 해원처럼 비 오는 날 청바지에 백팩을 메고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원래 서촌은 오후의 볕이 좋은 곳이다. 볕 좋은 날 원창식당에서 점심을 든든히 먹고 난 후 사직동 그가게에서 짜이 한 잔을 마시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사직동 그가게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골목 입구에 영화에 등장하는 SU모텔이 나온다. 사직단 옆에 있어서 그런지 모텔은 호들갑스럽지 않고 수수하다. 그 모텔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홍상수 영화 따라 걷기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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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후회가 없게, 죽음에는 두려움이 없게. 세번째의 암과 싸우는 cancer survivor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