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에게
첫 시집이 나왔다는 카톡 메시지에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마침내, 너의 목소리를 듣는구나. 회사와 일과 접대, 아내와 아이들 같은 삶의 무게를 견디며 짬을 내 조각조각 이어 붙였을 그 목소리.
그래, 내가 아는 S는 시인이지. 대견하다. 언젠가는 나올 줄 알았어. 어디 볼까? 월정사에서 우물을 찾는다라…
기대감에 소개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덜컥 마음이 내려 앉았다. 평론가인 누님의 발문에 쓰인 단어들, 식도암, 휴직, 수술, 복직, 폐 전이…
암이야? 너?
비쩍 마른 데다가 무엇을 말하는지 어디를 쳐다 보는지 모호한 표정까지 보고 나니 불길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입에 올려도 안되고 마음에 떠오르기 전에도 지워야 할 생각. 내 지난 경험이자 혼자가 될 때마다 반복해서 떠오르는 생각.
와장창 하고 깨진 살얼음판, 그 밑에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검은 심연.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는 팔과 다리, 검은 물 위로 떠오르는 날숨의 공기 방울이다.
이 시집이 마지막 시집이 되는 거 아닐까?
너는 짬짬이 시간을 내 이어 붙인게 아니라, 쫓기듯이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얼마 남았는 지 모를 미래 위에 한줄, 한글자라도 더 새기고 있는게 아닐까? 의심이 불안으로, 불안은 곧 안타까움이 됐다. 세포 독성 항암, 면역 항암제, 환우… 이런 말이 자연스레 입에 붙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시간을 묵묵히 견디는 건 사실 견디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인 것을 나는 잘 안다.
S야. 모든 사람들에게는 두개의 삶이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단 하나의 삶만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두번째의 삶이 시작된다고 하더구나. 나는 매년 6월과 12월에 정확히 반년마다 추적 검사를 받고 있다. 또한 그 검사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다시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고 매번 가슴을 졸이며 검사를 받고 결과를 듣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스스로를 속이곤 한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게 두번째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하루를 일년처럼 살려고 한다.
견뎌보자. S야.
인터넷 서비스 전문가.
전자상거래와 마케팅, 디지털 컨텐츠, 앱스토어, 모바일 게임에 20년 간의 경력이 있습니다. 최근에 노동조합 전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삶에는 후회가 없게, 죽음에는 두려움이 없게. 세번째의 암과 싸우는 cancer survivor입니다.
보라매 병원. 조합원의 부친상에 갔다.
환히 웃는 영정사진을 보며,
처음 뵙지만 고생하셨다고, 이제 평온히 쉬시라고.
두번 반 마음을 담아 절을 올렸다.
우리 아버지도 살아 계셨다면 저리 웃었을까.
육개장에 밥을 말아 넘기고 장례식장을 나왔다.
맞은 편 공원을 잠시 걷는다.
별 같은 달이 떠있어 사진을 한장 찍었다.
생명선 밑을 엄지손톱으로
꾹꾹 누르는 습관이 생겼다는 친구가 생각났다.
그 녀석은 폐로 전이된 암과 싸우고 있었다.
불현듯 나도 손바닥을 펼쳐 생명선 밑을 천천히 힘주어 눌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