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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

  • yoda 

[접속 The Contact]과 접촉, 그리고 웹진 [映畵] by iCE

1.AT! 米國의 Heyse社에서 최초로 모뎀에 명령어를 집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모뎀을 제어하는 여러 명령들을 헤이즈 명령어라고 하지요. 그 중에서도 AT라는 헤이즈 명령어는 접속을 준비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어이며 Attention(차려!)의 줄임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AT명령을 내린 후 바짝 긴장하면서 몸이 굳어지는 건 모뎀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 사이버스페이스로 들어가는 문을 열 때마다 왜 이렇게 떨리는 것일까요? 그 단순한 bit(BInary digiT)의 집합체를 향해 대체 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요?

2. Just Contact! not Connect.
…언뜻 [접속]은 PC 통신을 매개로 한 감칠맛 나는 멜로 드라마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와는 전혀 무관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감수성의 러브 스토리”, “9월 도심 속에 숨어있는 사랑이 온다” 등의 광고 문구에 현혹되는 것은, 반짝이 포장지에 속아 넘어가 정작 근사한 선물은 팽개쳐 버리는 격이 됩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 봅시다. 이 작품을 감독한 장윤현은 제도권에서야 첫 작품이지만, 이미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지 오래입니다. [파업전야](死守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나요?), [오, 꿈의 나라]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미 철저하게 반사회적인 의식과 언어로 무장한 그가 어떤 모습으로 제도권으로 들어설 것인가의 문제는 매우 중대합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격렬한 몸싸움으로 80년대를 거친 많은 운동가들이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크게 고민한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였고, 이 점에서 [접속]의 장윤현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따라서 [접속]은 ‘대중과의 결속’과 ‘진보적인 운동’을 결합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과 같은 고민을 바탕으로, 굉장히 오래 그리고 신중하게 기획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갈고 닦은 칼날에 자신이 다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조심스레 내딛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곱씹어 보면서 [접속]을 감상하면, 장윤현이 대중과의 첫번째 접촉을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이끌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중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장르로 멜로 드라마를 골랐으며, 10대부터 30대까지(이들이 영화관을 찾는 주요 연령층이 아닐까요?)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로 PC통신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하고픈 얘기(브레히트의 ‘소외’ 개념을 확장/적용시킨 고립된 대중?)를 하기 위해서 Connection이 아니라 Contact라는 부제를 달았네요.
그래요, ‘접속’이 아니라 ‘접촉’.

3. We’re connected……Really?
…[접속]의 두 주인공인 동현(한석규)과 수현(전도연)은 실생활에서는 늘 타인과의 접촉에 실패하며 그 상처를 지니고 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동현은 옛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수현은 짝사랑에 힘겨워합니다. 작가는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결국 인간 관계로 단정할 수 있습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 그토록 무능력(?)한 사람들이 PC 통신을 통해서는 묘한 연대감을 갖게 됩니다. 이름도 없으며 얼굴도 없는, 그래서 그/그녀를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가상 현실 속에서는 아주 성공적인 접촉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아이러니는 다음과 같이 자명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익명성이 행복을 보장하는 사회는 더 이상 고전적인 개념-복수의 인간 사이에 끈적한 유대를 통해 관계가 생겨나고 그러한 관계들이 사회를 형성한다는-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며, 동시에 개인의 행복/행복에 대한 조건 역시 변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접촉은 철저하게 일대일의 함수 관계를 갖게 되며, 개인의 얼굴은 어떠한 공통 분모도 갖지 않습니다.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한 전자정보 통신 혁명은 이전의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낯선 기업, 권력, 인간형, 조직, 기술, 문화, 제도 등을 탄생시켰고 이에 인류는 당황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대 국가가 등장한 이후 조금씩 조금씩 파괴된 토속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공동체(게마인샤프트)에 존재하던 따뜻한 인간 관계를 이제는 찾아 볼 수 없으며, 그러한 감성으로 유지되던 사회로 돌아가는 것 역시 불가능한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현대의 인간들은 자신에게 정작 필요한 자유롭고 평화로운 얼굴을 버릴 수 밖에 없으며, 막중한 짐으로 다가오는 얼굴들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을 내보이는 것이 힘들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찾게 되는 것이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익명의 시공간이 천국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는 이미 절절하게 다루어져 있습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 얼굴은 내 얼굴, 당신의 얼굴은 당신의 얼굴일 뿐이며 이름 따위는 더더욱 소용없는 공간에서 개인은 행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 이러한 단락-고립-두절로 이어지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현대인의 머리 위로 한 가닥의 동아줄이 내려옵니다. 사이버스페이스라고 불리는 이 동아줄은 타고 올라갈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동아줄일까요?

관련 글  V for Vendetta (10/10)

4. Real & Cyber
… 무수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와 넘치는 정보 집하장의 한가운데 당신은 지금 서 있습니다. 동아줄을 부여잡고 올라와 보니 이런 곳에 서게 된 것입니다. 키보드를 들고 목청껏 그녀를 불러 봅니다.
“수현님이 맞습니까?”
모니터를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기 그지 없습니다만, 정말로 그녀가 수현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접속]에서 수현과 동현은 여러번 어깨를 스치지만 서로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서로의 눈을 ‘직접’ 들여다 보고 미소짓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눈을 들여다 보는 일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요? 따라서 작가가 논하고자 했던 바는 가상의 공간이 얼마만큼 유용한가의 문제로 귀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가상 공간 자체에 대한 의문이었다면, 동현과 수현이 만나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가상 공동체(Virtual Community)에 대해 희망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동현과 수현이 만났듯이 현실 사회의 변화를 전제로 한 전망일 뿐입니다. 현실 사회에 존재하는 무수한 부조리들을 수정하지 않는 이상 사이버스페이스에 존재하는 행복은, 현실의 소외/불평등/불안을 숨기는 눈가리개가 될 뿐입니다. 인터넷을 통한 멀티플레이의 강렬한 게임이 짜릿한 쾌감을 줄 수 있으며, 전자 게시판의 다양한 토론이 민주적인 기반을 강화시킬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인류의 미래를 책임지는 공동체의 형성으로 ‘직접’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가상 세계의 변화만으로 인류가 행복해 질 수는 없다는 결론이지요.
마지막으로 쟝-뤼크 낭시(Jean-Luc Nancy)의 주장 하나를 덧붙여 봅니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란 오히려 ‘완전히 이해하고 동화될 수가 없는 타인’의 이질성에 의해서 찢겨지면서도 ‘더욱 더 그러한 타인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공동체의 무위/1985]

5. [접속]과 웹진 [映畵]
… 영화 [접속]과 웹진 [영화]는 가상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를 빌어 iCE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웹진 [영화]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웹진의 전체 방향성과는 상치될 수도 있는 사견임을 먼저 밝힙니다.
문학 평론가 김현은 한반도 최고의 모더니즘 시인인 金洙映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다. 그것은 그의 초기 시편에서부터 그가 죽기 직전에 발표한 시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끈질긴 탐구 대상을 이룬다. 그는 엘뤼아르(P. Eluard)처럼 자유 그것 자체를 그것 자체로 노래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를 詩的 理想으로 생각하고, 그것의 실현을 불가능케 하는 여건들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시가 노래한다라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절규한다. [김현/김수영전집.1 詩/1981/민음사]
웹진 [영화]의 iCE는 이것을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웹진 [영화]의 영화적 시각은 자유다. 그것은 웹진 [영화]의 창간부터 웹진 [영화]가 폐간될 때까지 발표될 모든 글들에 이르기까지 웹진 [영화]의 독특하고 자유로운 색깔을 이룰 것이다. 웹진 [영화]는 평론가들처럼 영화 그것 자체를 그것 자체로 평론하지 않는다. 웹진 [영화]는 자유로운 사고를 영화보기의 기초로 생각하고, 그것의 실현을 불가능케 하는 여건들을 가차없이 파괴한다. 따라서 웹진 [영화]의 글은 파괴적이며 동시에 창조적이다라고 쓰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즐거운 놀이터가 또 하나 생기는구나.’ 처음에 웹진 [映畵]를 만들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 米國 잡지 [MAD]를 언뜻 떠올렸습니다. [MAD]의 파격과 재미를 담아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이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습니다. [MAD]는 이런 책입니다. [MAD]도 다른 잡지처럼 첫장을 열면 Contents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목차는 전혀 쓸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책의 각 페이지가 순서대로 매겨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p가 책의 중간쯤에 있고 그 뒷페이지는 43p이며, 또 그 뒤는 20p입니다. 이런 잡지, 진지하기보다는 냉소적이고 장난스러운/ 너무나 자유로워 어안이 벙벙한/ 도발적이다 못해 일탈적인/ 무엇보다 재미있는 잡지. 웹진 [映畵]가 이렇게 발전적으로 미쳐 버렸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웹진 [映畵]를 만드는 사람이 미쳤으면 좋겠고, 웹진 [映畵]를 찾아오는 사람도 미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iCE는 웹진 [映畵]에 미칩니다.
GNU는 ‘GNU is Not Unix’의 머릿글자이며 리차드 스톨맨이라는 프로그래머가 유닉스와 완벽하게 호환될 수 있도록 만든 무상 소프트웨어 시스템 제공 프로젝트의 이름입니다. 누구나 무료로 사용이 가능하지요. EFF는 ‘The 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의 준말이며 1990년에 발족한 비영리 시민 운동 단체입니다. 통신 공간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표현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공공정보에 대한 접근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하는 단체입니다. FSF도 있지요. Free Software Foundation, 무상 소프트 웨어 재단. 인터넷에는 이런 단체들이 즐비하게 있으며 그 활동력 또한 굉장히 왕성합니다. 웹진 [映畵]가 인터넷에 존재하는 만큼, 이런 저항 운동의 커다란 세포로 강력하게 기능하길 원합니다. 특히나 열악한 한국 사회의 문화 현실에 늘 신선하며 혁명적인 바람을 불어넣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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