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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 일지 (2010 1월 9일 ~ 1월 28일)

드디어 퇴원했습니다. 입원해 있는 끄적거린 낙서 몇개 정리해요.

  • 아이들의 예방접종을 위해 소아과에 갔다가 주차장 한켠의  얇은 얼음 위에서 미끄러졌다. 넘어지는 순간 확 달겨드는 극심한 통증에 이것이 경미한 사고가 아님을 직감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고 119가 도착해 응급조치를 할 때까지도 내 머리속은,아니 내 몸 속은 오로지 한가지로 가득찼다. 고통. 바로 그것이었다.
  • 응급실 병상에 누워 고개를 세워 바라본 내 다리는 HR 기거의 이질적인 공포, 그 자체였다. 무릎은 천장을 향했으나 발가락은 오른쪽으로 심하게 돌아간, 일상에서는 접할 수 없는 낯선 각도.
  • 약간의 고통만으로도 인간은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나약함을 자각하게 된다. 그저 한쪽 종아리 뼈가 부러졌을 뿐인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예를 들자면 몸을 돌아 눕기는 커녕 심지어 숨조차 크게 쉴 수 없다.
  • 링거 주사의 바늘을 피해 혈관이 자꾸 숨고 애써 주사 바늘이 들어가도 이내 팔이 부어오르고 만다. 내 머리가 십년 전에 잊은 지난 일들을 내팔과 내몸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 병상 간이침대에 누운 어머니께서 코를 고신다. 저 불편한 공간에서 말이다. 많이 피곤하셨다. 몸도 마음도.
  • 부러진 다리에 하중을 싣지 않으면 아프지않다. 하지만 한쪽다리의 힘을 빼고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몸이기 때문이다.
  • 고 통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아내와 어머니는 진땀을 흘리고, 제법 몇차례 경험이 있는 나는 별 일 아닌척 굴고, 의사들은 상투적으로 대한다. 내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자 진통제를 처방하려고 했다. 그들은 모기약으로 모기를 쫓듯 몰핀으로 통증을 제거하려한다.
  • 외우주개발, 물질과 반물질, 하이퍼스페이스, 광년, 블랙홀, 콜로니. 여러 SF 소설들의 오마쥬를 천일야화의 형태로 옮겨낸 이 만화 `2001 스페이스 환타지`는 걸작이다.
  • 아이티 강진. 구호를 위해 전세계사람들이 모여들고있다. 어째서 인류는 아이티가 이렇게 되기 전에는 도와줄 생각을 못 했을까? 혹은 아이티보다도 못한 빈민국들을 도와줄 생각을 못할까? 죽어가는 사람들은 가진게 없을 뿐이다. 돈 또는 권력, 21세기 현대 사회에서는 동의어.
  •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가는길. 천장만을 바라보며 이동하는 것은 늘 새롭다. 사물의 뒷면을 바라보는 느낌?
  • 의식이 희미해져온다. 내가 물었다. “마취가 되고 있는 거지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의사의 모습. 그 방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이것이 나의 다섯번째 전신마취다. 이렇게 쓰고보니 꽤나 허약한 인간이다. 원시였다면 진작 도태되었을.
  • 종아리에 긴 철심을 박고 그 양 끝을 다리뼈에 고정시키는 수술. 무사히 끝났다. 얼얼한 무릎과 근육이 당기는 듯한 허벅지, 간간이 아주 날카로운 발목 통증. 살아있다는 증거다.
  • 카드게임(솔리테어)만 하루에 백판넘게.
  • 관찰1. 그는 퇴원이 이틀 연기된것이 가장 안타깝다. 스키를 타다 복숭아뼈를 다친 사십대 후반의 그는 하루라도 빨리 집에 가고싶을 뿐이다.
  • 관찰2. 상병인 그는 혈압이 낮아 수술이 곤란하다며 여러 차례 심전도 검사를 했다. 현재는 어깨 수술을 마치고 회복중. 몸은 좀 고달퍼도 그의 낮잠과 간식은 더없이 달아보인다.
  • 관 찰3. 입원생활이 삼개월이 지나고있는 60대 중반의 그는 현재 모든 생활이 불만스럽다. 더군다나 이미 천만원이 넘어간 입원비에 대한 스트레스, 노후한 병원 시설과 옆자리 환자며 의사 등등에 대한 은밀한 험담. 대신 병원 생활이며 진료비,각종 질병에 대한 민간요법 등에 대해 해박하다. 그의 유일한 낙은 세끼의 식사, 선택제로 고른 식사가 맘에 들 경우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 수술한지 이틀째 몸의 회복속도는 놀라울 정도다. 자연은 늘 엔트로피가 증가하지 않던가? 꼬매놓은 살이 붙는 속도, 통증이 사라지고 다리의 감각이 되돌아와 나는 이제 발목위에 올려진 얼음주머니의 찬 기운을 느낄수 있다. 확실히 서양 의학은 인체를 기계적으로 취급하는 방식인데 그런 1차원의 수준에서도 의학계는 극복해야할 난제가 한둘이 아니다. 확실히 인류의 지식이라는거,얇다.
  • 한의학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의학은 적어도 인체를 기계와 같다고 보진 않는다. 그래서 동양소설에 프랑켄슈타인이 없는 것이다. “한의학이 3기 위암을 고친나요?” 못 고친다. 그러나 기를 보하고 섭생에 주의하면 암이나 당뇨,고혈압이 발생할 일이 훨씬 적어지지 않던가?
  • 새벽 두시,발 받침대에서 발이 흘러내려와 아프다. 어머니를 깨워야하는데 곤히 주무신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했으나 결국엔 어머니를 깨우고 말았다. 반대의 상황이라면 어머니는 날 깨웠을까?
  • 세종시 공방, 공방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그들의 논리의 끝에 어떤 목표가 있는 지도 잘 드러나지 않을만큼 치졸하다. 아니 교묘한가?
  • “특수효가 없는 고난도 액션” 8인 최후의 결사단의 영화카피다. 이런 카피가 의미있을까? 결국 관객이 보는 것은  제작 과정이 아니라 화면. 그 화면을 위해 fx도, 고난도액션도필요한 것이다. 가상의 FX가 실재의 액션을 점점 대치하고있는데 말이다.
  • 휠체어 타고 화장실에가서 똥 싸는 일이 이리 힘든 일이었던가. 내친김에 머리도 감았는데 다 끝나고 나서 어머니도 나도 파김치가 되었다.
  • 수술한 지 나흘째, 이제 누워서 무릎을 들어올릴 수 있다. 놀랍고 신기한 인체의 회복력.
  • 새벽 세시, 관찰2의 그 군인 환자는 아직 침상에 없다. 휴게실에서 친구들과의 수다.
  • 병상이라 그런것일까. 과거에 대한 꿈을 많이 꾼다. 과거의 좋은 기억들. 초등학교 친구들,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때 운동하던 때, 시나리오 쓰던 때. 과거는 늘 미화된다.
  • (한국사회에서)정직은 두가지 경우 의미있다. 자신에게, 그리고 이해관계자 중 정직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있는 경우. 그 외에 대중에게 정직하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자기 기만인다.
  •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을 미워할 수 있을까. (상대적으로)좋은 가치관이 있는 것일까. 예컨대 돈과 권력을 위해 사람들을 죽인 전두환,노태우를 미워하는 나의 가치관은 그들의 가치관보다 더 나은 것일까?
  • 원치않지만 하 루종일 티비를 보게 되었다. 자꾸 노출되니 관심이 생기고 의식이 바뀐다. 매스컴의 위력이다. 집단최면이라고 할까? 주관을 갖고 비판적으로 시청하지 않으면 속아넘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의 문제다. 퇴원하면 마샬 맥루한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 갑자기 늙어버린 배우의 얼굴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그의 일, 나의 나이, 그의 미래, 인생의 덧없음… 멜 깁슨.
  • 작가는 하릴없어야겠다. 일상과 세계를 사색하고 관찰하고 묘사하는 중에 깊이가 더해진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어째서 쇼 프로그램의 TV 자막은 교열하지 않는 것일까? 맞춤법이 틀린 엉성한 자막은 그 프로그램이 얼마나 선정적인가를 나타내는 지표와 같다.
  • 통증이 사라지고나니 식욕이 생긴다. 식욕을 해결하면 또 어떤 욕망이 생길까?
  • 무작정 병실에 들어와서 ‘육신의 죽음은 사망’ 운운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다. 그 무례함이 환자들의 화를 불러일으켜도 당당한 광신도는 하루에도 몇명씩 쳐들어 온다.
  • 좌우대칭. 한체대 핸드볼 선수가 두명 들어왔다. 공히 무릎인대 관련 부상인데 한쪽 무릎의 이상을 파악하기위해 반대쪽 무릎과 비교해본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비교할 반대편이 없다는 데에 있다.
  • 국회 폭력사건에 대한 검찰과 법원의 대립이라며 반복적으로 강기갑의원을 내보내는 것을 봐라. 뉴스가 아니라 주입식 교육이다.
  • 수술 후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퇴원까지 일주일이 남았다.
  • 무심코 만진 오른쪽 허벅지는 왼쪽에 비해 절반 두께로 가늘어졌다. 하긴 11일간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니.
  • NDSL ‘역전재판’에 흠뻑 빠져 들었다. ‘쥐박이’라는 문구도 등장.
  • 자전거도로의 억지 신설로 인한 폐해 – 이것의 근원적인 문제해결은 서울에 집중된 기능의 분산뿐이다. 그것이 세종시가 탄생한 배경이다.
  • 미국 정부가 진정 아이티를 돕고 싶다면 “우리는 50명의 고아를 입양했어요”라고 이야기하는 대신 “아이티를 비롯한 빈민국 아동의 건강과 교육을 위해 장기적인 지원책을 마련했어요”라고 해야한다. 입양 등의 일회적이고 미시적인 조치들은 보도없이 알아서 하면된다. 김장훈을 보라. 그의 미담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을 포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 체대 환자의 여성 친구들, 그들도 운동선수인듯 수술에 대한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 누군가의 표현, “환자들의 기운이 병실의 시간을 더디가게 만든다” 동감이다.
  • 입원한지 2주가 지났다. 찾아와주고 전화해주고 문자 보내주는 사람들. 내가 살면서 함께할 사람들이다.
  • 관찰4. 96살의 할아버지가 무릎수수을 받고 옆자리에 오셨다. 신음소리도 가냘퍼 안쓰럽기도 하고 두렵기도하다.
  • 새벽네시 채혈 때문에 잠이 깼다.
  • 관찰5. 흰머리 때문에 나이가 더 들어보이는 50대초반의 아저씨. 동상 때문에 발가락을 모두 자르거나 발목 이하를 잘라내거나 해야한다. 동상이 걸린 원인은 과음으로 인한 야외 취침.
  • 병원에 정형외과 환자가 넘친다.
  • 드디어 내일 퇴원이다. 9일 입원 – 28일 퇴원. 무려 19일간이다. 통증, 수술, 무료한 시간, 미래에 대한 긍정적이고 의욕적인 계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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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 일지 (2010 1월 9일 ~ 1월 28일)”의 6개의 댓글

  1. 퇴원 잘 하셨는지요? 병상 일지를 보니 생각보다 심했네요!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 중요 한 것을 요즘에 깨닫고 있습니다.

Joonyoung Kim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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