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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두기] 최승자 시인의 인터뷰

  • yoda 

2010년 11월 인터뷰이니 10년이 지났다. 와닿는게 많아 슬프고 그 마음의 일부는 이해할 수 있어 옮겨둔다.

원문: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21/2010112101107.html

[최보식이 만난 사람] 정신분열증… 11년 만에 시집을 낸 시인 최승자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0.11.22 03:04

“어떤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귀에서 환청(幻聽)이 들리고 내가 헛소리를 마구 내뱉고 있었지요.”
시인 최승자(58)의 음성에서 쇳소리가 났다. 살가죽이 겨우 붙은 얼굴과 그 속의 쑥 파인 눈, 마른 막대기 같은 몸피를 숫자로 환산하면 키 149cm 체중 34kg이 된다.


시인 최승자는“시를 계속 쓸 것이고, 밥만 잘 먹으면 된다”고 말했다.
시인의 외양이 따로 있을 순 없다. 하지만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며 80년대를 사로잡았던 시인의 몰골이 지금 이렇다는 것은 섭섭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말이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일상임에도, 그녀에게는 ‘사건’이 됐다. 얼마 전 그녀는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냈다. 그동안 다섯 편의 시집을 내고서 11년 만이다. 시인이라고 늘 시를 쓰라는 법이 없고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 한때 그녀의 시에 매료됐던 사람들도 그냥 그런가 싶었다. 그녀는 잊혔다. 마치 그녀가 등단 초기에 썼던 시 구절처럼.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공백의 시기에 그녀는 심신쇠약과 정신분열 증세를 앓고 있었다. 여전히 입원 중이다. 이날 입원해 있던 포항의료원에서 그녀는 잠시 나왔다. 허름한 청색의 외투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외삼촌 신갑식씨가 보호자로 따라 나왔다.

포항으로 내려가는 열차 속에서, 그녀를 만나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나는 ‘인터뷰 일’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제대로 될까. 내가 낯선 존재 앞에서 질문을 잊었을 때,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느 해에는 여섯 달쯤 잠을 못 잤어요.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했고. 잠을 못 자면 소주를 마시고 쓰러져 잤는데, 나중에 심해지면서 술을 마시는 것조차 생각나지 않았어요. 정신이 휑했지요.”

이번 시집 안에 그런 ‘사람들은 잠든 적도 없이’라는 시가 들어 있다.

‘삼천갑자동방삭이/ 내 아비가 누군고/ 내 어미가 누군고/ 묻고 또 물었던 대답 없는 세계/ 외침조차 흔적 없었던 세계/ 사람들은 잠든 적도 없이/ 잠들어 살고/ 제 집도 아닌 줄 모르면서/ 제 집처럼 산다/ 오늘도 사람들은 죽은 神을/ 어영차 끌고 가서/ 황무지에 버린다’

그녀는 가족이 없었다. 서울의 세 평짜리 고시원과 여관방에서 밥 대신 소주로, 정신분열증으로, 불면의 시간으로, 죽음의 직전 단계까지 간 그녀를 찾아내 포항으로 데려온 이가 외삼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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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격정적인 시들은 숱한 청춘(靑春)들을 감염시켰습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같은 구절은 여전히 인용됩니다. 시집들도 베스트셀러였는데 어떻게 3평짜리 고시원을 전전할 수 있습니까?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시가 낭송되고 있었어요. ‘참 좋다, 누구 시인가’ 혼자 이런 생각을 했는데 내 시였습니다. 한때 매스컴이나 문단에서 자주 내 이름이 거론됐어요. 하지만 실제로 시집이 많이 팔린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내 시가 인용된다고 해서 시집이 많이 팔렸다는 것은 아니지요. 시를 쓰는 것으론 전혀 생활이 안 됐어요. 나는 번역을 해서 먹고 살았어요. 영어 원서는 지금도 읽어내요. 그러다가 내가 지금의 이상한 병에 걸렸어요. 내게는 모아놓은 돈도 없었어요. 내 시와 번역서를 냈던 출판사 두 곳에서 내 사정을 알고 있었지요. 매달 25만원씩 부쳐줬습니다. 하지만 몇 해쯤 지나 내가 다시 번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이젠 안 도와줘도 될 것 같다’고 내가 전화했어요. 출판사에서는 내 자존심을 헤아려줬습니다. 하지만 내 병은 깊었어요.”

―자신이 병에 걸렸음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귀에 환청이 들리고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하고 있었어요. 소주 말고는 전혀 음식물을 몸속에 넣을 수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나는 서울의 한 친척집에서 지내고 있었지요. 그런 나의 이상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었습니다. 99년부터 친척집을 나와 고시원과 여관방을 떠돌았지요.”

―그걸 의식했다면 스스로 극복할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지인들도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지 않으냐’고 했어요. 모 출판사에서는 내가 나와서 작품을 쓸 수 있도록 사무실 안에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내 몸과 정신이 무너진 뒤였어요. 자신을 어떻게 통제할 수 없었지요.”

―가장 궁금한 대목은 시를 쓰던 당신이 폐인(廢人)처럼 됐다는 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노장(老莊)·명리학·사상의학·점성술 등과 같은 신비주의 공부에 빠졌던 겁니다.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세계가 아닌,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로 좇아갔어요. 답이 있을 듯하면서 손에는 답을 쥐기 어려운 공부였어요. 그 공부에 빠지면서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다시 묻지만, 왜 자신의 모든 것을 놓아버릴 정도로 신비주의에 빠지게 됐습니까?

“한때 문학은 대단하게 보였으나…, 시를 쓰는 일이 시시해졌어요. 시를 쓸수록 동어반복이 됐습니다. 다섯 권의 시집을 내면서 난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봤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도 허무하고, 내가 묶여 있는 사회와 체제, 문명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이를 초월하는 어떤 세계로 끌려들어간 것이지요. 1994년 아이오와대학 초청으로 넉달간 미국서 지내면서 점성술을 접한 것도 계기가 됐어요. 구어체 영어를 익히려고 하다가 그래 됐지요. 선정적인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오늘의 운세’ 같은 ‘별자리점’을 보게 됐고, ‘나는 쌍둥이좌인데…’ 이렇게 시작됐어요. 물론 그전부터 준비된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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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돼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문단(文壇)에 나오기 전부터 삶의 허무를 알았어요.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하면서 거기에 나오는 숱한 인물의 삶과 죽음들이 내게 모두 내면화된 것입니다. 누구나 다 살아가고 저마다 운명이 있지만, 결국은 허무했어요. 그때 이미 나는 세상과 운명의 본질을 다 봤는지 모릅니다.”

―신비주의로 가면 ‘나서 죽는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영생(永生)을 원했던 겁니까?

“내가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계가 매력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쪽은 차원이 달라요. 아직도 내가 풀 수가 없어요. 그걸 추구하면서 병들어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 시집의 제목처럼 ‘쓸쓸해서 머나먼’ 것이었지요.”

―젊었을 때는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느꼈지만, 이제 50대 후반까지 살아보니 다르게 보이지는 않는가요?

“내가 본 세상은 절망스럽고 허무한 것이었어요. 절망의 끝, 허무의 끝, 죽음의 끝까지 가봤던 셈이지요. 그 끝은 삶의 긍정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개울돌 늘 이쁜 물소리로 가득하고…’라고 썼어요. 내가 머문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는 아기가 방긋 웃기만 해도 즐겁고 이쁜 개울물이 흘러간다는 걸 알아요. 다른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고 있다는 걸 나도 압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가….”

―이왕이면 ‘낙관’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은가요?

“허무와 절망은 내 운명이었어요. 문학은 슬픔의 축적이지, 즐거움의 축적은 아니거든요. 젊은 날 나는 무의식적으로, 충동적으로, 비명(悲鳴)처럼 시를 써왔어요.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되지요. 그건 보통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이제는 시를 의식적으로 씁니다. 그럴 나이가 됐어요. 나도 살아가야 하니까요.”

―선생의 시 중에는 ‘저 불변의 세월은/ 흘러가지도 못하는 저 세월은/ 내게 똥이나 먹이면서/ 나를 무자비하게 그냥 살려두면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신을 폐인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나요?

“죽으면 죽겠다 싶었어요. 내가 썼던 시집 다섯 권만 둥둥 떠다니겠지 했어요. 2년 전 막내 외삼촌이 나를 찾아내 병원에 입원시킨 것입니다. 병원에서 규칙적으로 내게 밥 세 끼를 먹이고 약 먹이니 살겠더라고요. 당초에는 ‘이 정신의 병에 약을 먹은들 되겠나’ 생각했어요. 이건 정신의 문제인데도…. 밥을 먹으니 괜찮아졌어요. 병원만 나오면 먹는 것을 잊어버려요. 그래서 다시 입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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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와 사회가 시인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요? 오늘 찾아온 것은 사실 이 때문입니다.

“그건 틀린 말입니다. 자기 삶을 사회나 남에게 전가할 수는 없어요. 괜히 ‘우리 시대가 저 친구를 버려놓은 것이 아닌가’ 말하는데, 이는 내가 선택한 삶이었어요. 나 혼자 겉돌았고 그런 공부를 했고 병원에 들어가 있었을 뿐입니다.”

―선생의 문제는 몸을 저버린 정신의 ‘과잉(過剩)’에 있는 것 같군요.

“정확한 지적입니다. 이제는 젊은 날처럼 정신이 전부라고 여기진 않아요. 하지만 정신적으로 추구한 삶은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선생은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병들어 있습니다. 다른 여성들처럼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없나요?

“전혀 없어요. 결혼해 가정을 꾸린 당신들이 잘사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렇게 못해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그 아이들을 내가 직접 키우면서 사는 것은 싫어요. 이기적이라고요? 그건 맞아요. 젊은 날 그런 제의가 있으면 먼저 내가 떠났어요. 나는 홀로였고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시장통을 한 바퀴 돌며 감자 고구마 고추 생선들을 구경하고, 가로수 길을 걷고, 이쁜 아이들을 쳐다보고, 간혹 버스를 타고서 산을 쳐다보는 것, 그걸로도 만족합니다.”

―무엇을 하면 가장 즐거운가요?

“요리할 때입니다. 나 스스로는 밥 먹기가 힘들지만, 과거에는 요리 대장이었어요. 이제 같이 먹을 사람도 없고, 병원 들어가면 밥 주니까, 음식을 만들 기회가 없을 뿐이지요. 사실 병원 밥도 맛있어요.”

―본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시를 계속 쓸 것이고, 밥만 잘 먹으면 돼요.”

나도 그녀에게 삼시 세끼 잘 먹기를 당부했다. 정신이란 몸이 있어야 유효하다는 생물학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뭔가 ‘열띠지만 모호한’ 인터뷰를 끝내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현실에서 시인은 5년 전부터 ‘기초생활수급대상자’였다.

☞최승자 시인은…

고려대 독문과 수학. 1979년 등단. 도발적 감각과 자유분방한 언어로 여성성을 탈피했다는 평가. 시집으로는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연인들’ ‘쓸쓸해서 머나먼’. 대산문학상을 수상(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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