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패배는 나의 힘 – 황규관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댓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善)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
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
거기서 끝까지 싸워야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
끝내 패배한 자여,
패배가 웃음이다

패배는 나의 힘, 황규관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이다”다시 싸움을 맞는 일, 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라는 시인의 물음은, 자조적이지만 원칙적이라 울림이 크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삶은 싸움의 연속이 되어버렸고, 승자는 패자를 짓이기고 한번이라도 진 패자는 몇계단씩 굴러 떨어져 위태로운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시 싸운다는 것은, 승패와 관계 없이 계속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의미하면서 한편 졌지만 다시 싸울 수 있는 올바른 사회구조가 필요하다는 뜻으로도 들린다.
패배는 나의 힘. 시인을 제외하고, 이렇게 얘기하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Similar Posts

  • 자기계발. 머니볼 (moneyball)

    머니볼 – 마이클 루이스 지음, 윤동구 옮김, 송재우 감수/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었다. 실은 꽤나 오래 전에 jmirror군의 추천으로 wishlist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좋은 줄 알았다면 진작에 독파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감사를. 이 책은 야구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주제는 야구를 포함한 조금 더 큰 무엇인가를 담고 있어서 야구를 좋아하지 않아도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 탁월한 기획자는 그림으로 사고한다. by 히사츠네 게이이치

    파워포인트를 잘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책은 아니고(오히려 저자는 도해의 초보 단계에서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말 것을 권한다), 사고의 단계와 과정을 그림으로 압축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한장의 압축된 그림이 몇장의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음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이 책이 그것을 콕 집어 설명하지는 않는다. 짧은 시간에 최대한의 사고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도해‘라는 개념을 도입, 무에서…

  • 소설. 16/100 Go. 가네시로 가즈키

    시원한 소설이다. 가네시로 가즈키 소설의 주인공은 동일 인물이다. 그는 재일 한국인(Korean Japanese)의 부당한 차별대우에 항거하며 늘 어두운 그림자를 지니고 있으나, 담배나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엄숙한 정결함과 끊임없는 독서 -그것도 소설이 아니라 철학,인문학,자연학의-를 바탕으로 박식하며 정돈된 논리를 튼튼히 한다. 육체적인 단련도 게을리 하지 않아 3명 정도의 상대는 가뿐하게 처리할 수 있고 100미터는 12초 안에 주파한다….

  • 2010년 첫날, 다섯권의 책

    2010년부터 책과 영화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로 마음을 바꿨다. 작년에는 책을 읽다와 영화를 보다의 카테고리에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책이나 영화에 대한 비평의 수준이 스스로를 만족시키지 못할 만큼 저열했고, 이 블로그를 전자상거래와 웹 서비스 전략에 관한 내용으로 특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해를 그렇게 운영한 결과, 나는 무슨 책을 어떻게 읽었는 지 기억이 나지 않고 또한…

  • 시. 풍경 달다 –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돌아오는 길에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풍경을 달고 돌아왔다.먼데서 바람 불어와풍경소리 들리면보고 싶은 내 마음이찾아간 줄 알아라. 관련된 글: 시. 수선화에게 – 정호승 정호승의 시 몇 수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 최영철 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이병률 비둘기호. 김사인 어느 봄날. 나희덕 시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시 #싯구 #죽음

  • 희랍어 시간. 한강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을 읽었다. 말을 잃은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남자의 입맞춤은 세상의 끝에 있다는 거대한 폭포를 향하듯 위태하고 가엾다. 한강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말에 올라타 곡예를 하듯 아슬한 글을 쓴다. 그녀의 문학적 생명이 부디 길기를 바란다. 관련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