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힘찬 아나키의 근본이여.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의 소유란 무엇인가에 감명 받고 있습니다.
1장의 첫구절을 잠깐 보세요.
만일 내가 <노예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해야만 한다면, 그래서 내가 한마디로 <그것은 살인이다>라고 답한다면, 나의 생각은 당장 이해될 것이다. 인간에게서 사상, 의지, 그리고 인성을 빼앗을 수 있는 권력은 곧 생사여탈의 권력이며, 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그를 살해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굳이 군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에 대해 <그것은 도둑질이다>라고 마찬가지로 답할 때마다, 내 답변이 잘 전달되지 못했다는 노파심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두번째 명제는 사실상 첫번째 명제가 모양을 바꾼 것에 불과한 데도 말이다.
나는 우리의 정부와 제도들의 원리 그 자체, 즉 소유의 문제를 논하려고 한다. 이것은 나의 권리이다. 나의 연구에서 도출되는 결론이 틀릴 수도 있다. 이것도 나의 권리이다. 이 책의 끝에 가서 도달한 사유를 나는 책의 첫머리에 놓고자 한다. 이 역시 나의 권리이다.
이렇게 명료하고 힘차게 자신을 펼쳐보이는 글을 근래에 읽은 적이 없습니다.
틀릴 수도 있지만, 그것도 나의 권리이다 – 이 얼마나 당당합니까.
언어학과 인문학을 거쳐 철학, 그리고 소유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
프루동 역시 천재였습니다.
아나키즘이 – 어쩌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치일런 지도 모르는- 이렇게 근근히 명맥만을 유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너무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탓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물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력이 타인을 두렵게 만들었던 게지요.
또한 그들은 너무 민감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순수한 감수성과 오감으로 시를 쓰고 소설을 쓸 수는 있었지만,
‘역사’를 쓸 수는 없었습니다.
히틀러나 스탈린, 부시 같은 ‘배부른 돼지들’에 비하자면 바쿠닌과 크로포트킨, 프루동은 ‘배고픈 현인’쯤 되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혁명가’라면 응당 지녀야 할 강철의 의지, 그것은 아나키스트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ps. 출근하자마자 일찍 퇴근하여 푸르동에 한껏 빠져들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대략 우울한 하루가 될 듯.
🙁
인터넷 서비스 전문가.
전자상거래와 마케팅, 디지털 컨텐츠, 앱스토어, 모바일 게임에 20년 간의 경력이 있습니다. 최근에 노동조합 전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삶에는 후회가 없게, 죽음에는 두려움이 없게. 세번째의 암과 싸우는 cancer survivor입니다.
음. 이제 트랙백이 제대로 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