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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제주 (2월 8일 ~ 11일)

  • yoda 

올해 설은 제주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처음입니다. 설과 추석, 해마다 두번씩 꽤 긴 연휴가 있는데 이 시간을 좀 더 알차게 보내고 싶었습니다.

명절은 점점 연휴와 비슷해 지고 있습니다. 대가족 시대, 모든 친족이 안부를 나누는 의미를 빼고 나면 사실 음식 만들기 밖에 남는게 없습니다. 그 음식들도 품은 매우 많이 들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서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2~3일을 그렇게 보내고 나면 허망한 생각을 지울 수 없지요.

이번 명절을 제주에서 보내고 보니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다만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 다음 명절엔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겠습니다. 숙박비나 교통비가 평소의 배 이상입니다.

2월 8일

김포 공항은 꽤 붐볐습니다. 비행기는 만석. 식구들은 모두 흩어져 앉았고 저는 이륙과 동시에 잠이 들어 착륙할 즈음이 되어야 깼습니다. 창 밖의 구름 바다를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제주 미담

제주 공항 근처 식당에서 첫끼로 고기 국수를 먹기로 했습니다. 제주 미담은 4-5팀 정도가 대기 중이라 20여분을 기다렸습니다. 고기 국수, 멸치 국수, 몸국, 수육. 고기 국수는 고기가 듬뿍 들어간 진한 국물맛을 느낄 수 있었고 수육도 야들야들하고 고소했고 일행 모두 ‘웬지 모르겠는데 제주도 돼지고기는 부드럽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주 동문 재래 시장

동문 시장에 들렀습니다. 설 날 아침 떡국을 끓여먹기 위해서죠. 심지어 떡국 떡과 만두, 김치는 이미 챙겨오신 어머니. 어디를 가든 누가 오든 늘 ‘식구들 먹을 거리’ 챙기는 것을 최우선하는 어머니께 짜증도 많이 내곤 했지만, 한참 후에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새삼 그리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작년에 맛있게 먹었던 크림빵을 사볼까하고 아베베 베이커리로 갔지만 역시 줄이 엄청나게 길어서 포기.

이 하루방은 언제부터, 그리고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까요?

돈내코힐 리조트

516 도로를 타고 성판악을 지나 숙소로 향했습니다. 겨울에 516 도로를 지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경치가 정말 좋더군요. 특히 성판악 즈음에 있는 숲터널은 봄이나 가을에 오고 싶을만큼 멋진 길이었습니다. 구불불한 2차선 도로의 가장 자리 나무들이 마치 터널처럼 하늘을 가리며 휘어져 있었습니다.

숙소에 짐을 푸니 이미 4시가 넘은데다가 아내는 체기가 있어 다들 좀 쉬기로 했습니다.

원앙 폭포

답답했던지 둘째는 잠시 나가겠다고 하길래 같이 나섰습니다. 돈내코힐 주변은 한라산 자연 경관 보존 구역이고 나무와 숲이 그래도 많이 보존된 지역입니다. 갈만한 곳을 찾다가 300미터 아래에 있는 원앙 폭포를 향해 천천히 걸어 갔습니다. 숙소에서 원앙폭포 입구까지 300미터, 입구에서 다시 폭포 쪽으로 300미터, 그리고 아주 가파른 경사로 100미터 정도를 갔습니다. 도착하고 보니 정말 누가 숨겨놓은 것 같은 작은 폭포가 절묘하게 숨어 있었습니다. 아, 놀라운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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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물놀이도 가능한 지역인데 상상해 봅시다. 누군가가 어릴 때 이 동네에 살았고 매해 여름 물놀이를 했었다면 이 폭포는 그에게 평생 그리움과 추억, 그리고 미지의 영감을 줄 것입니다. 산과 바다, 계곡과 강, 숲, 바람, 하늘, 햇살… 이런 자연을 몸으로 느끼고 감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한 사람의 생애에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큽니다. 유튜브와 틱톡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경외와 경이, 이런 경험이 점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한참 멋을 부리는 둘째는 에어팟 한쪽을 귀에서 떼놓지 않아요.

우야지 막창

속이 안 좋은 아내는 저녁을 굶고 쉬기로 하고 남은 식구들을 데리고 일단 올레 시장으로 갔습니다. 어머님과 둘째가 좋아하는 곱창을 먹기로 즉석에서 결정했습니다.

2월 9일

휴애리 자연 생활 공원

숙소 근처에 동백을 볼 수 있는 명소가 많았고 그중 휴애리 자연 생활 공원을 갔습니다. 아주 큰 정원이었는데 계절마다 꽃을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 두었습니다. 동백은 이미 지는 참이라 많진 않았고 대신 유채가 한참 기지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제주 흑돼지를 기르고 있었고 마침 갓 태어난 새끼 돼지들을 볼 수 있었어요.

제주 곰집

점심은 ‘제주 물질 식육 식당’에서 짬뽕을 먹기로 했습니다. 백종원이 다녀간 곳이라는데 그보다는 복지리와 짬뽕이라는 단순한 메뉴와 노포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도착하고 보니 연휴 기간에는 휴무. 아쉽지만 다른 음식점을 찾아봤고 (어차피 한끼는 먹을 예정이던) 돼지 고기집으로 향했습니다.

흑돼지를 추구한다…는 묘한 표현을 쓰고 있는데, 확실히 맛있었습니다.

베릿네 오름

점심 식당에서 추천 받은 오름입니다. 오름이라기보다는 동네 뒷 언덕 같은 곳이었는데 북쪽으로는 한라산이, 남쪽으로는 바다가 보이는 멋진 오름이었습니다. 올레 8코스에 포함되어있고 중문으로, 천제연 폭포로 이어져 있다고 합니다.

본태 박물관

지난 훗카이도 여행에서도 안도 타다오의 건축을 보고 왔는데 이번 제주 일정에도 넣었습니다. 작년 제주 여행에서 수풍석 박물관을 예약하고 오자고 했건만 제주에 와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수풍석 박물관은 거의 3개월간의 예약이 꽉 차있어 다음으로 미루고 이번엔 본태박물관과 방주 교회에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필리핀의 여성 단체가 폐 플라스틱 쥬스곽으로 만든 제품. 선진국의 쓰레기가 제3세계로 수출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서글픈 작품입니다.
2024년 제주 (2월 8일 ~ 11일)
노출 콘크리트, 자갈, 물, 바람. 안도 타다오의 구성요소.
자연 채광이 멋진 공간입니다. Zen room.

특별전으로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가 있었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사다리’라는 작품은 그야말로 마음을 뒤흔드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사방이 캄캄한 작은 방의 중앙에 끊임 없이 색이 변하는 사다리가 있습니다. 사다리의 위와 아래에 원형 거울이 있어서 위,아래의 거울을 쳐다보면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사다리가 이어집니다.

이처럼 거울을 통해 무한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야요이의 감각은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공간에 대한 지각을 파괴하고 더 나아가 시간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방주 교회

본태 박물관 바로 옆에 안도 타다오의 방주 교회가 있습니다. 자연 채광으로 십자가를 볼 수 있는 곳, 전체의 구조가 방주 형태를 띄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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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앵무새

저녁 먹을 시간까지는 카페에서 보내기로 하고 야크 마을이라는 리조트 안에 있는 ‘서울 앵무새’에 들렀습니다. 사실 논짓물 족욕카페에 가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미 3번 정도 갔고 제주에 와서 그럴싸한 커피를 못 마셨기 때문에 커피가 괜찮은 곳을 찾아갔습니다.

서울 앵무새는 성수동에서는 매우 붐비는 카페입니다만, 이런 지점이 제주에 자꾸 생기는 건 그닥 반가운 일은 아니에요. 무엇이든 그렇지만 제주는 특히 고유의 색깔을 지킬 떄 더 빛나고 오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선 식당

작년에 정말 맛있게 먹었던 고등어회를 먹기 위해 모슬포항에 왔습니다. 작년하고 마찬가지로 ‘미영이네’를 먼저 찾았지만 대기팀이 좀 있었고 바로 옆집인 만선 식당은 대기가 없었습니다. ‘맛은 다 똑같지 뭐’ 작년과 같은 대사를 교환하고 만선 식당에 자리했습니다.

김을 깔고 밥을 조금 얹은 후에 고등어회를 올려 먹으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카페에서 빵을 먹고 와서인지) 작년처럼 맛있지는 않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조금씩 고등어회 대자를 다 먹고 다시 반접시를 시켜서 다 먹었습니다. 역시 맛있는 식사였습니다.

가족 퀴즈 대회

작년에는 깜짝 이벤트로 ‘돈 퍼기가’ 이벤트를 준비해서 모두가 즐거워했고 이번엔 퀴즈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식구들에 대해 좀더 잘 알자는 의미에서 준비했습니다. 사전에 카톡으로 각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받았습니다.

  1. 가장 좋아하는 색
  2. 가장 좋아하는 음식
  3. 세단어로 나를 설명하세요
  4. 가장 좋아하는 노래
  5. 다음 생에 동물이 된다면?
  6. 세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7. 학창시절 가장 좋아한 과목은
  8. 나의 휴대폰 배경화면은?
  9. 무인도에 남겨진다면 가지고 갈 물건
  10. 지금까지 살면서 최고의 하루는
  11. 전세계에 메세지를 보낼 수 있다면 무엇을 보낼 건가요?

그리고 https://slideswith.com/decks/ 에 다같이 볼 수 있는 문제 덱을 만들었습니다. 이 덱을 티비에 연결해서 띄우고 참가자들은 각자의 스마트폰을 통해 퀴즈를 맞추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런 이벤트는 학교나 회사에서도 많이 하고 가장 유명한 툴은 kahoot 인데, 1회용으로 쓰기에는 금액이 과했습니다. 연간을 제외하면 월간 구입이 가능한 플랜은 29$입니다. 게다가 무료 버전은 참가 인원이 3명 밖에 되지 않고요. slideswith.com은 그런 면에서 아주 훌륭한 대안이었습니다.

2월 10일

설날입니다. 어머니와 아내가 열심히 준비한 끝에 떡만두국을 먹었습니다. 큰 냄비도 없고 고명을 만들 후라인팬도 넉넉치 않아 겨우 떡국이 완성됐습니다. 생애 첫 제주에서의 설날, 생애 첫 제주에서의 설날 떡국. 고맙습니다.

원앙 폭포

아침을 먹고 짐을 꾸려 체크아웃했습니다. 다음 숙소가 함덕 쪽에 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첫날 다녀온 원앙 폭포에 모든 식구가 같이 같습니다. 어제 발견한 지름길을 이용했는데도 폭포로 내려가고 올라가는 가파른 경사에서 모두들 힘들어했고 특히 어머님은 더 힘들어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시간,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스누피 가든

작년에 동선이 애매해서 넘어갔던 스누피 가든을 갔습니다. 여기를 들러서 매우 좋았지만 역시 애매한 동선과 시간 때문에 아내가 잡은 일정(서우봉 둘레길)을 소화할 수 없게 된 것은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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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 가든은 숲의 원형을 해치지 않으면서 인공의 조형물과 인형들이 적당히 배치돼서 조화로웠습니다. 부담스럽지 않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스누피의 정서적 위로가 공간 전체에 은은하게 깔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누피 만화에 담긴 사색과 가벼움이 모든 이들을 다독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왜 이렇게 힘들지’ 싶을 때 스누피 가든에서 한나절을 걷고 나면 툭툭 털고 일어설 힘이 날 것 같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사는 거 별 거 아니다. 계절 지나는 게 더 중요하다. 바람이 불면 종이 비행기를 날리고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들어라, 스누피 가든은 그런 곳입니다.

삼신 할망 밥상

스누피 가든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 집은 특이하게 갈치 튀김이 있었습니다. 의외로 식구들은 이 갈치 튀김에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저는 전반적으로 비싸다 싶었고 꼭 다시 갈만한 식당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보룡 제과

숙소인 돈내코힐 리조트가 한라산 자락에 있다보니 생각보다 바다 구경을 못했습니다. 성산에 있는 보룡제과를 들렀다가 해안도로를 타기로 했습니다. 보룡제과는 인심이 좋은 오래된 빵집이었고 마늘 바게트과 몇개의 빵을 사 함덕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베베 베이커리

한시간 이상 바닷길을 따라 느긋하게 운전했습니다. 비도 오고 시간이 이미 많이 늦어 숙소 말고 동문 시장에 다시 들리기로 했습니다. 명절 선물로 나눠줄 옥돔을 구입했습니다. 첫날 줄이 길어 실패한 아베베 베이커리에 혹시나 하고 가보니 어쩐 일인지 대기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무려 12개의 크림빵을 구입했습니다.

아이미 제주 비치 호텔

함덕 해수욕장 바로 앞에 있는 숙소를 잡은 이유는 서우봉 둘레길을 가기 위해서였는데, 스누피 가든에서 시간을 오래 쓴데다가 날이 궂어 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해수욕장 앞 전망대로 야간 산책을 갔습니다.

하이루

https://naver.me/xLJ5kKyS

갑자기 비가 쏟아져 저녁은 매콤한 짬뽕으로 결정, 마침 숙소 근처에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중국집을 발견했습니다. 하이루.

짬뽕, 돌문어 짬뽕, 짜장면 등을 주문했고 짬뽕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깊은 맛이 있었습니다. 충분히 다시 갈만한 맛이었습니다.

2월 11일

순풍 해장국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해장국집을 들렀습니다. 고사리와 내장이 들어간 육내탕은 처음 보는 메뉴였는데, 육개장보다는 부드러운 맛이었습니다. 제주 3대 해장국집 중의 하나라는데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고 불편없이 먹을만한 정도였습니다.

하양한

오가면서 눈에 익었던 가게였습니다. 무인 푸딩 전문점. 어떤 맛일지 궁금해 푸딩을 3개 샀습니다. 이건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과하지 않은 단 맛에 부드럽고 탄력있는 식감이 해장국 다음의 디저트로는 맞춤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김포로. 그리고 일상으로.


이번 제주 여행은 안도 타다오와 쿠사마 야요이, 그리고 스누피가 남았습니다.

안도와 쿠사마는 예술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깊은 감동을 주었고, 스누피는 삶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되새길 수 있도록 그리고 쉽게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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