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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 yoda 

아마 이 편지가 제가 아버지께 드리는 첫번째 편지인 것 같습니다. 맞지요?

살아 계실 때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도 잘 떠오르지 않으니 편지 같은 건 아마 국민학교 어버이날에 보낸 게 마지막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은 몇 주 전부터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이 아버지와 저의 나이가 같아지는 날이기 때문이에요. 돌아가시던 때의 그 나이, 어느 새 저도 그 나이가 됐어요.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생각이 많고 그렇습니다. 이제 내일이 되면 제가 하루를 더 살게 될 것이고 내년 이맘때 쯤이면 제 나이가 더 많아지게 되잖아요.

그 오래 전 아버지께는 군대에 간 대학생 아들이 있었고 지금 그 나이의 제게는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이 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지만 저는 시시 때때로 힘들다는 소리를 내뱉곤 합니다. 남들은 평생 한번 걸릴까 말까 하는 큰 병을 세번이나 겪은 탓도 있겠지만, 살아보니 인생은 그리 만만하지 않있습니다. 살아 계셨다면 제가 좀 더 강한 척 했을 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무너져서는 안될 마지막 방벽이 되어 선 느낌입니다.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좋은 아빠였다는 소리를 가끔씩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듣습니다. 노력하고 있지만 저는 좋은 아빠도 좋은 남편도 아닌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 제일 많고 건강 때문이긴 하지만 가장의 의무가 버거워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많거든요. 2년 전에 받은 세번째의 암 수술로 위를 모두 제거한 후유증이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식사시간이 무척이나 괴로운데 밥을 한숟갈 뜰 때마다 해머로 복부를 가격당하는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몸이 그렇게 힘겹게 버티고 서있으니 마음도 몸을 따라 상처 투성이가 된 채로 견디고 있습니다.

삶에는 아쉬움이 남지 않게, 죽음에도 두려움이 생기지 않게. 마음을 다잡아보기도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요즘은 미래나 계획 같은 건 잘 떠오르지도 않고, 그저 이번 주, 다음 달, 어떻게 하면 좀더 재미있게 보낼까 하는 정도의 생각이 있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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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도 가장 아쉬운 건, 약주 좋아하시는 아버지께 술 한잔 제대로 따라드리지 못한 일이에요. 술을 받은 적이 없는 것도 아쉽지만, 아들이 따라주는 술을 받는 건 꽤 기분이 좋을 것 같거든요. 그 아쉬움은 매우 크고 아마 죽을 때 까지도 간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딘가의 한적한 대포집, 깜빡이는 전등불 아래 안주 몇가지를 늘어놓고 소주든 맥주든 빈잔을 채우고 고개를 돌려 술을 마시는 풍경 같은 거죠. 요즘 어떠냐고 묻기도 하고 서로 건강은 괜찮은지 확인도 하고요. 다음 번에 같이 갈 여행 계획도 세우고 손주들 챙겨주라고 용돈도 넣어주시고. 남들한테는 평범한 일상이었을텐데 막상 그런 기억을 갖지 못하니 그건 그것대로 부러운 일이 되버렸습니다.

어제는 어머니와 가까운 산사에 다녀왔어요. 어머니도 연세가 꽤 됐고 전과 달리 많이 걸으면 힘들어 하시곤 합니다. 30년 즈음 제사를 지내면서 매해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 지도 궁금해요. 한번도 여쭤보진 않았지만, 그리고 죽은 자를 위로하는 것은 결국 살아 남은 자들에게 의지를 북돋아주는 의식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그리움도 섞여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보니, 얼마나 열심히 사셨는지 얼마나 힘들었을 지 조금은 알겠습니다. 그럼에도 그 어떤 내색 없이 당당하고 굳건한 모습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 기억마저 없었다면 더 힘들었을 것 같네요.

고맙고 감사해요.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그 때는 잊지 않고 꼭 약주 한잔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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