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야
바람처럼 쉬이 네게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널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1년하고도 6개월 전이었으니까.
그즈음 나는 큰 수술을 받고 나서 매우 힘들었다.
무려 세번째의 암수술.
메스로 잘라낸 건 위장이었지만 더 많이 찢겨 나간건 마음인 것 같아.
조만간 모든 게 끝날 지도 모른다는 막막함. 차라리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 싶은 절망감.
그런 감정의 밑바닥에서 내 장례식에 와서 한번쯤은 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적기 시작했다. 기력을 회복하고서는 그들을 한명씩 만났고 앞으로도 계속 만나며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Y야.
그 목록에 네 이름을 써 넣으면서 나는 매우 부끄러웠고 후회가 됐다.
힘들 때 도와주고 위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자주 봤더라면 어려운 길을 선택한 너를 막아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말이다.
뒤늦었지만, 고난의 시간 잘 이겨내줘서 고맙고 잘 살아 줘서 고맙다.
Y야.
20여년 만에 만났지만 너는 옛 기억 속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더구나.
모난 구석 없이 매끈하고 단단한 작은 차돌 같은.
지금도 편지를 쓰면서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을 떠올리고 있다.
그때야 말로 우리 생의 봄날이었던 것 같다. 무엇하나 거리낌없었고 따뜻했고 자유로웠지.
철이 없었기도 했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웃긴 시간들이었고.
인생은
결국 그런 시간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널 만나기 위해 기차를 예매하고 달력에서 날짜를 확인하고 차창을 스쳐 지나는 6월의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옛일을 회상하는 그런 시간들 모두가 내 인생의 한 부분인게지.
20년 만에 만나 아내와 아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서점에 들르고 술을 주고 받는 시간들.
나는
빛나고 기쁘고 아름다운 시간들로 남은 인생을 채워나가고 싶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고, 조금이라도 내 주위 사람들이 기뻤으면 좋겠다.
어제 정기 검진이 있었어.
6개월에 한번씩 이상이 없는 지 검사를 하는데, 그건 마치 생명 연장을 위한 단기 비자 같아.
‘앞으로 6개월간 삶에 더 체류해도 좋습니다’
Y야.
다음 번에는 가족들도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에게는 낯선 만남이겠지만 서로에게 좋은 인연이 될 것은 확신한다.
인생이 시간의 누적이라면 그것을 더 충만하게 채워줄 수 있는 건 좋은 사람들과의 연결이기도 하니 말이다.
곧 뜨거운 여름이 올테지만, 그보다 더 열정적으로 살아보자.
늘 건강하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종종 연락하자.
고맙다.
2023.06.
인터넷 서비스 전문가.
전자상거래와 마케팅, 디지털 컨텐츠, 앱스토어, 모바일 게임에 20년 간의 경력이 있습니다. 최근에 노동조합 전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삶에는 후회가 없게, 죽음에는 두려움이 없게. 세번째의 암과 싸우는 cancer survivor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