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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 yoda 

방 불을 끄고 누워 전자책을 읽다가 이런 시는 남겨두어야겠다 싶어 부랴부랴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종이책은 사진을 찍어 올리는 맛이 있는데, 전자책은 사진을 찍으면 재미가 없고 캡처도 되지 않아서 천상 타이핑을 해야겠습니다.

박준의 시는 전반적으로 약간 슬픕니다. 죽음의 향내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눈물이 말라 쓸쓸한 풍경을 연상케 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풍경들에서 정서적으로 닿지 않는 감정을 끌어다 슬픔과 연민에 대어놓는데 여기에서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감정의 환기가 주는 충격이 제게는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질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부딪침은 동음 이의어를 연결하는 문장 구조를 통해 더 확장되고 강화됩니다. 시집 제목에도 나오듯 “~이름을 지어다가 ~먹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신선함은 기형도 시인의 ‘오래된 신문’이나 ‘광속의 햇살’같은 표현에서 느꼈던 눈부심에도 비견할만 했습니다.

그의 시 중에서 몇 문장을 남깁니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시인의 말

두 다리를 뻗어
발과 발을 맞대본 사이는

서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어린 애인에게 들었다

미신

겨울이 아니어도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는
밤이 이르고

덜 마른
느릅나무의 불길은
유난히 푸르다

당신의 연음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꾀병

내가 청파동에서 독거니 온실이니 근황이니 했던 말들은 열에 여덟이 거짓이었다 이곳에서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당신이 보고 있을 내 모습이 보인다 새실새실 웃다가도 괜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둘 다시 당신을 생각해 웃다가 여전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여덟이었다

2:8 -청파동2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네가 피우다 만 담배는 달고 방에 불 들어오기 시작하면 긴 다리를 베고 누워 국 멸치처럼 끓다가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정도의 글귀를 생각해 너의 무릎에 밀어넣어두고 잠드는 날도 많았다 이불은 개지도 않고 미안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지난 꿈 이야기를 하던 어느 아침에는 옥상에 널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별빛을 먹어 노랗게 말랐다

광장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지금은 우리가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환절기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마음 한철

해를 등지고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보는 저녁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 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는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저녁 -금강

시집의 말미에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라는 발문이 있습니다. 허수경 시인의 글이었습니다.

관련 글  한산: 용의 출현 (8/10)

박준의 시에서 느낀 죽음의 그림자와 텅 소리나게 비어있는 삶의 이면은, 역시나 그랬던 것이었군요.

세계는 언제나 불편한 것이었다… 우리는 농담처럼 이 세계를 통과하기를 바랐다. 농담은 우리의 허브였다…그는 이 세계가 자신의 위장 속에서 결국 소화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에 시달린다…아, 그리고 삶과 죽음…. 삶은 그토록 얇은 얼음장이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는….

준아! 첫 시집, 축하한다. 얼마나 길은 멀까, 다음 시집이 나올 때까지는. 파울 첼란이 독일에서 첫번째 시집 [양귀비와 기억]을 내고 난 뒤 두번째 시집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를 준비하면서 미래의 부인 지젤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 인용하면서 이글, 마친다.

“나는 많이 읽고 있어요. 언젠가 당신을 위하여 새 책을 쓰기 위하여, 저의 첫 시집이 독립된 삶을 살려고 하는 것보다 이것은 더 급한 일처럼 보입니다”(강조 인용자)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

부럽군요. 허수경 시인으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는 시인이라니.

ps. 삶이 얼음장이라는 허수경 시인의 인식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있다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표현이지만, 어느 연예인의 불현듯한 죽음을 보고 비슷한 생각에 빠졌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2가지로 분류된다던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상담도 기억납니다. 죽음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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