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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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기형도
기형도
기형도

Freeze 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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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ze Me

: 독특한, 아주 독특한 일본영화.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들을 차례대로 살해 후 냉장고에 유기한다는 설정에서는 상투성이 엿보이나, 스토리 전개 및 세부 심리묘사가 탁월하여 관객의 주의를 잡아당긴다.

김훈의 인터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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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는다.

의외의 인물이다.
지독한 마초에 군국주의자임을 당당하게 자처하는 이 인간은, 오만한 인간이다.

별로, 싫지는 않다.

—————–
지난해 東仁文學賞 수상자인 소설가 金 薰(54)씨에게 전화로 인간탐험을 위한 인터뷰를 하자고 했더니 대뜸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元老大德(원로대덕)이나 나가는 자리에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나갑니까. 오셔서 술이나 한잔 하시지요』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언론계에서 같이 일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한동안 소식이 끊겨 나는 어쩌다 바람결에 그의 소식을 듣곤 했다. 그러다가 東仁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옛날 애인을 만나러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를 만나러 가는 발길이 설레었다.

원로대덕이란 말이 나한테는 좀 생소한 말이어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에 있는 그의 집필실에서 그를 만나자마자 그 말부터 물어봤다.

―원로대덕이란 말이 불교에서 나온 말인가요?

『불교에서는 高僧大德(고승대덕)이라고 하는데, 그걸 俗化시켜서 元老大德이라고 하는 거지요』

말을 들으면서 보니까 그는 꼭 스님의 차림을 하고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스님들이 입는 재색 개량 한복 바지에, 재색에 가까운 스웨터, 재색 목도리….

―그러고 보니 스님 다 됐네!

『머리만 안 깎았지 스님 다 됐어요』

방 안을 살펴보니, 사극에 나오는 것과 같은 자그마한 書案(서안) 위에 육조선사가 해설한 금강반야바라밀경이 반쯤에서 펼쳐진 채로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내가 놀랍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니까, 그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거대해서…. 다만 내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해서 저런 책을 보고 있는 거지요』

그는 책을 집어들고 말했다.

『이게 언어를 부수는 겁니다. 제자들이 부처님한테 뭘 물어보면 부처님은 그걸 그대로 대답하지 않고, 질문이 말이 안 된다고 그 질문을 깨는 겁니다』

그는 느릿느릿 말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폭풍처럼 몰아쳤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다』

―왜 이런 책을 봅니까?

『이런 책은 말을 깨면서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물살에 따라 흘러내려가면서 뒈지러 가는데…. 그러니까 어떤 始原(시원)으로 돌아가서 더럽혀지지 않은 세계의 모습을 저 책이 보여 주고 있지요』

그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 대신 「∼놈」 또는 「∼새끼」를 썼다. 그래서 春秋筆法에 따른 言文一致로 표기하지 못한 곳도 많다.

―저런 세계가 金薰씨의 문학세계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무의식의 세계에서 무슨 관계가 있을지…. 세상을 깨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문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왜 읽는지.

저건 인간의 언어가 아닙니다. 가령 논어는 훌륭한 분의 말로, 증명할 필요가 없는 분명한 말이거든요. 가령 애비가 자식을 자랑하는 것은 졸렬한 놈이고, 자식이 애비를 흉보는 놈은 나쁜 놈이다, 이런 말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분명한 말이거든요』

―언제부터 이런 쪽에 들어섰나요?

『혼자 독학을 해서 체계 없이 한 쪽으로 치우친 게 아닌가 모르겠어요. 하여튼 오래 전부터 동양학에 관심을 갖고 논어 맹자 같은 걸 읽었어요』

그의 회심의 역작 「칼의 노래」에는 전편에 無常 또는 虛無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일본군의 행실과 입을 통해 법화경과 연화경의 구절이 인용되고 있다.

그는 그의 집에서 걸어서 5분쯤 걸리는 곳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집필실로 쓰고 있었다. 3∼4평쯤 됨직한 방에는 싱크대가 있었고, 한 쪽으로 화장실을 겸한 샤워실이 붙어 있었다.

출입구 맞은 편에 아무 장식이 없는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는 그 곳에서 몽당연필을 연필 깍지에 끼워서 원고지 칸을 메우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가 김훈이라고는 하지 마세요. 이제 겨우 두 편 썼는데 소설가는 무슨 소설갑니까, 쪽 팔리게』

그는 봐달라는 시늉으로 손을 비볐다. 그러면서도 그는 장편소설 얘기를 열심히 했다.

『지금 거의 다 썼어요. 50살 먹은 썩은 인간이 불륜을 저지르는 얘기지요』

―그럼 세속적으로 가치가 없는 인간의 연애군요.

『연애를 가장 아름다운 거라고 한다면, 그 아름다운 것도 더러운 세상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할려구 그래요. 요새 젊은 작가들이 연애를 괴기하게 만들어가지고 현실과 관련 없이 허공에 띄워 놓고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生老病死거든요. 내가 그 틀 안에다 연애를 집어넣어서 연애라는 것도 生老病死의 일환이고, 生老病死의 과정으로서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스토리로서는 재미가 없겠지요』

「칼의 노래」 쓰고 自信感 얻어

여기서 그는 또 소설가 얘기를 했다.

『이런 걸 쓴다고 내가 소설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나는 소설로 一家를 이룰 생각은 없어요』

―지금 분명히 소설 쓰는 것으로 돈이 들어오지요?

『예, 쪼끔. 그러나 그걸로 業을 삼지는 않을려고 그래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을 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지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까 소설가가 되고 싶지도 않고 그 소설을 많이 팔고 싶지도 않은 사람한테 조선일보가 「동인문학상」을 줘서 괜히 성공한 소설가의 길로 몰고 있네!

『글쎄 난 별로 성공했다는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상을 받았을 때 개인적인 기분은 좋았어요. 그 소설을 끝냈을 때, 아무도 하지 못한 얘기를 내가 하고야 말았구나, 하는 자신이 있었거든요』

잘 알다시피 「칼의 노래」는 충성심으로 가득 찬 忠武公 李舜臣의 생애를 허망함과 싸우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칼의 노래」에서 작가로서 역점을 뒀던 건 뭡니까? 많은 사람들이 文體를 얘기하던데.

『문체는 완전히 제가 새로 만든 거죠. 전에는 제가 진양조 같은 24박자짜리 문체를 썼거든요. 그런데 여기선 완전히 두 박자죠. 주어와 동사만 가지고 썼으니까. 문장을 뼉다귀만 가지고 쓴 거죠. 살은 다 빼버리고. 그런데도 그 문체를 보고 또 수사학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한국인이 역사적으로 그런 문장을 썼던 일이 없었는데 그걸 제가 만든 거죠. 내가 생각해도 엄청나요! 그 문체로 그 소설을 끝까지 써낸 거죠』

―외국문학에선 그런 일이 적지 않았는데, 헤밍웨이도 지독한 단문을 썼고….

그건 그렇다 치고 내용적으로는 어떤 점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까?

『한 영웅의 내면을 그린 것인데, 그 영웅이 가지는 중세적 가치, 이를테면 忠孝라든지, 勤王(근왕·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함) 이라든지, 復♥(복벽, 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름)주의라든지, 그런 가치를 그 영웅으로부터 제거해 버린 거죠. 적나라한 실존적 내면만 남겨 놓은 거죠』

―소설가는 창조를 하는 사람이니까, 남이 하지 않은 일을 처음 하는 데 상당한 의미를 자타가 부여하지만, 구태여 이순신한테서 그런 가치를 제거하려고 한 뜻은 어디에 있었나요? 내 생각엔 충무공한테서 충성과 애국을 빼면 충무공이 아니지요. 부처님한테서 佛心을 빼면 부처님이 아니듯이.

『이순신 장군은 사실상 그 중세적 가치로 전쟁을 했을 거요. 그런데 亂中日記를 보니까 그의 내면이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대목들이 행간에 언뜻언뜻 나왔어요. 형식적으로는 勤王, 復♥이겠지만. 왜냐하면 그때는 군인이 충성심을 표방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을 당했으니까. 그러니까 자기 내면에 어떤 갈등이 있더라도 王에게는 忠誠心을 보여야 했죠』

―그런 대목이 어디에 있던가요?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고 40일 동안 갇혀서 매를 맞고, 혐의가 없어서 풀려 나왔잖아요. 그런데 나오던 날, 일기에 그냥 「몇 월 몇 일 맑음. 오늘 옥문을 나왔다. 어느 집에서 잤다」 이것만 써놨어요. 딱 한 줄로. 다른 아무 말도 안 썼어요. 그 동안 매를 맞고 고문당한 정치적 부당함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죠. 그런 걸 기록에 남기면 죽이니까. 이런 걸 보면서 이순신이 충효사상에 의해서만 전쟁을 수행한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인간 이순신」을 복원했군요.

『예, 그러나 그건 내 환상 속에 있는 것이지, 실제로 이순신이 그런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요』

―「칼의 노래」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女眞이란 여자를 데리고 잤는데 멸치 젓국 썩는 냄새가 났다고 돼 있어요. 그런 구체적 단서가 어디 나옵니까?

『「난중일기」를 보면 여진이란 여자가 나오는데 굉장히 천한 여자였던 것 같아요. 이순신 장군이 해남 사령부에 있었는데, 이 여자가 여기 와서 자고 아침에 갔다가 며칠 있다가 또 와서 또 자고 가고 그러거든요. 이런 걸 봐서 이 여자는 병영에서 꽤 가까운 데 있었을 겁니다. 아마 군대를 따라다니던 창녀가 아니었나 생각돼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이 여자와 하루에 (성행위를) 「세 번 했다」고 써놓기도 했어요. 군인이라서 정확하게 썼어요. 두 번 했으면 두 번 했다고 썼구요. 그런데 이은상 선생이 번역한 난중일기에는 그런 부분을 다 빼버렸지요. 忠武公이란 그 거룩한 이름에 누가 될 부분은 다 뺐어요. 또 난리통에 제대로 씻지 못 하고 먼 길을 걸어다녔을 테니까 젓국 냄새 얘기를 쓴 거구요』

―「칼의 노래」는 쓰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작년 겨울에 두 달 걸려서 썼어요. 그런데 보름간을 놀았으니까, 사실은 한 달 반 동안 쓴 거지요. 저는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하루에 세 시간만 글을 써요. 나머지는 자전거도 타고 그러면서 놀아요』

『연애소설도 성공하고 싶다』

―요즘도 그러고 놉니까?

『그럼요. 혼자서 뛰고, 자전거 타고, 등산하고, 그러면서 놀지요. 그러고 나면 내 몸이 아주 건강해진 느낌이 쫙 와요. 자전거는 참 오래 탔어요. 일산서 임진각 왕복하는 데 80㎞거든요. 이걸 세 시간이면 갔다와요. 제가 지금도 스피드 레이서들하고 경기를 해도 꿀리지 않아요. 재작년에도 9박10일 간 자전거를 타고 국도로 서울에서 목포까지 갔어요. 빨리 가면 4박 5일이면 가요. 중간중간에 친구들과 술 먹고 노느라고 더 걸리는 거지요』

―이순신 장군한테 특별히 매달린 건?

『내가 고대 영문과에 다닐 때 19세기 낭만주의를 배웠는데, 워드워즈, 바이런, 셸리, 키이츠를 읽다가 난중일기를 읽게 됐어요. 낭만주의가 아름답고 이상적이고 그렇잖아요. 그때 이은상의 난중일기를 읽으니까 낭만주의가 다 거짓말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인간으로서 입에 담기 유치하고 졸렬한 소리를 이자들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때 내가 이담에 난중일기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글을 써야겠구나 하는 결심을 했죠. 그때는 내 역량이 너무 없어서 그런 글을 쓸 수가 없었지요. 그후에 신문기자를 그만두고 나서 시간도 있고 해서 쓰기 시작한 거죠』

―지금 金薰씨가 만들어 놓은 새로운 것들을, 영역을 넓히고 두께를 두텁게 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해야 할 텐데요.

『저는 그 문체를 또 버렸어요. 지금 쓰는 연애소설에는 안 맞아요. 그래서 또 새로운 문체를 찾아가는 중이지요. 이번엔 일단 논리적으로 안정된 문체를 가지고 갈려고 그래요.

「칼의 노래」 문체는 너무 가파라서 독자들이 따라오기 어려운 문첸데, 여기선 가파르지 않은 문체를 쓰고 있어요. 「칼의 노래」에선 문장과 문장 사이에 공백이 너무 커서 거기 빠지면 헤어나지 못해요.

이순신 사령부의 제2인자인 배설이 명량해전 직전에 도망갑니다. 치명적인 타격이죠. 그때 난 이렇게 썼어요.

「배설을 잡지 못했다. 저녁 때 여종을 불러서 서캐를 잡게 했다.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배설을 잡지 못했다」

이렇게 써가니까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공백이 있잖아요. 이런 문체로는 지금 쓰는 소설을 쓸 수 없는 것이죠』

―실험적으로 해 본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은 평가를 했다는 말이 나오면 안 되지 않겠어요? 「김훈 문학」의 탑을 쌓아야 할텐데.

『그렇게 하고 싶은 소망은 있는데, 그렇게 될지 모르겠어요. 소설을 쓰다 안 되면 그냥 때려치울 겁니다. 그러고 또 몇 년 놀아야 하지 어떻게 하겠어요. 소설 쓰는 게 굉장히 어렵지만 또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그게 돈이 생깁니까, 뭐가 생깁니까. 뼛골만 빠지지』

―그럼 金薰씨가 소망하는 건 뭡니까? 나는 소설로 一家 이루는 것도 원치 않는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원치 않는다, 「김훈 문학」의 탑을 쌓는 것도 안 되면 그만 두겠다….

『오직 요번 소설을 잘 쓰는 겁니다. 제목은 아직 못 정했는데. 4각, 치정, 불륜입니다』

―소설이라는 장르로 처음 쓴 것이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1995)인데, 어떻게 쓰게 된 건가요.

『소방관 얘긴데, 나는 소방관을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재난을 보면 다 도망가는데, 소방관은 달려들잖아요』

―그거야 뭐 충무공 이순신도 같은데 뭘!

『그렇지요. 일맥상통하지요. 소방관이 불 끄러 들어갔다가 죽고 좌절하는 얘긴데, 아나키즘 같은 소설이죠. 실패한 겁니다. 읽은 사람도 없어요』

그는 1948년 5월5일 어린이날에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아버지 金光洲(작고, 소설가)씨와 어머니 鄭戊順(82, 在美) 사이에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형제 얘기가 나오자 그는 종이 위에 5남매의 이름을 쓰고 성별과 나이를 다음과 같이 표기했다.

金燕(59, ♀) 金萍(56, ♂) 金薰(54, ♂) 金蓉(50, ♀) 金(45, ♀)

그의 선친이 남매들의 이름에 모두 草두를 붙여 돌림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와 막내 여동생만 한국에서 살고 있고, 어머니와 나머지 3남매가 미국에 가서 살고 있다.

『1970년 무렵 한국 젊은이들의 꿈이 미국 가는 거였을 때, 우리 형제들이 꼬랑지 빨간 노스웨스트 타고 갔어요. 거기서 그냥 취직들 해서 살아요』

그는 대대로 서울에서만 살았다.

『저는 서울 토박이거든요. 청와대 옆 청운동에서 대대로 살았어요. 그래서 가회동, 누상동, 원서동, 사간동으로 옮겨 가면서 살았어요』

그는 말하면서 백지에다가 조선시대 한양을 그린 首善圖(수선도)처럼 둥글넓적하게 서울의 모습을 그리고 4대문과 대궐, 남산, 청계천을 표시해 넣었다.

『청계천 북쪽 대궐 부근을 북촌이라고 하고, 청계천 남쪽 남산 부근을 남촌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계속 대궐을 중심으로 그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북촌 사람이지요.

우리 어머니의 인간관이 4대문 밖에 사는 사람들은, 영남 사람이건 호남 사람이건 다 금수로 보는 겁니다. 인간이 아니고 금수다 이거지요. 내가 뚝섬 사는 애들하고 놀아도 어머니는 「그런 애들하고 놀지 마라. 인간이 아니다」 그러셨어요. 그런 애들 목소리에선 「왜가리 짓는 소리가 난다」고 하셨어요.

또 우리 어머니는 서울 안에서도 청계천 남쪽에 사는 남촌 놈들을 우습게 보셨어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대궐 주위에 모여 살던 북촌 사람들의 정서가 이런 거였어요』

충청도 출신인 나는 듣다못해 한마디했다.

―어머님은 어디 출신이신가요?

『물론 북촌 출신이시지요』

―그런데 정말 금수만도 못한 미국 사람들하고 지금 어떻게 사시나?

그러나 대답이 너무 쉽게 돌아왔다.

『어머닌 미국은 좋아하세요. 미국의 합리성과 규율을 너무 좋아하세요』

그는 계속했다.

『그렇지만 지금 영남하고 호남하고 정치적 이권을 놓고 서로 해먹으며 개싸움하는 것하고는 달랐지요. 자기 고향에 대한 자존심이었지요. 시골 여자들은 추석이나 설 때 떡 해 먹고 새 옷 입고 그러잖아요. 우리 어머니와 북촌 여자들은 제헌절을 좋아했어요. 우리가 헌법을 만든 날이니까, 이날이 명절이다 이거요. 추석날 떡 해 먹는 여자들하고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우리 어머니는 제헌절날 떡을 해 먹고 자식들한테 새 옷을 나눠 줬어요. 물론 서울 여자들한테 편협함도 있었지요. 시골 여자들처럼 정이 많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얘기는 더 발전된다.

『내가 어릴 때 보니깐 서울 여자들이 제일 존중하는 것이 度量衡(도량형)이었어요. 장사꾼 가운데 됫박을 속일려고 밑에다 뭘 까는 놈들이 있어요. 그걸 보면 여자들이 함께 동네에서 쫓아내 버렸어요. 그러니까 삶의 합리적 기준을 존중한 것이죠. 시골 사람들은 족보를 존중하잖아요. 이런 영향을 제가 제일 많이 받았을 겁니다』

―어머님께서 미국을 좋아하신다고 했는데, 金薰씨는 어떠세요?

『미국 참 좋은 나라죠. 세상에 김훈이 어머니하고 미국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하루도 안 어기고 우리 어머니한테 연금을 꼬박꼬박 줘요. 이런 걸 보면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뛰어난 나라죠』

―요즘 미국이 아프가니스탄하고 전쟁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그건 도덕이나 정의의 문제가 아니고 弱肉强食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나라의 목적은 딱 하나예요. 富國强兵 이외에는 없어요. 나라가 부국강병을 뛰어넘는 도덕이나 윤리를 목표로 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나라의 목표는 부국강병으로 끝나는 겁니다. 도덕과 윤리는 개인이 갖는 것이지요』

나라의 목표는 오직 富國强兵

내가 그를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그가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나의 이런 생각은 萬人의 지탄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내가 지탄이 무서워서 말을 못하고 살 순 없잖아요. 부국강병이 얼마나 좋아요』

―독일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탄할 근거도 없네요.

『침략적인 것을 지탄할 수는 있겠지요』

여기서 나도 그의 「놈」 어법을 한번 써 봤다.

―침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어떤 놈이 부국강병을 하겠어요?

『나는 내 조국인 우리나라가 숭고한 도덕적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여튼 나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매도당하는 건 전연 무섭지 않아요』

그는 이러고도 아직도 할 말이 많았다.

『우리 젊은 사람들은 도덕에 대해서 변비증에 걸린 거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오?

『도덕적인 똥을 싸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거요. 그런데 똥이 안 나오는 거요. 그러니까 똥에 갇혀 가지고 쌀라고 낑낑대고 있는 거요』

―예컨대….

『진보와 보수의 싸움 있잖아요. 다들 자기가 도덕적인 밥을 먹고 도덕적인 똥을 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변비에 걸린 거죠. 똥이 안 나오는 겁니다.

인간의 삶이란 진보와 보수로 구별되는 게 아니죠. 뒤섞여 있어서 아주 복잡한 것이지요. 그걸 어떻게 흑백으로 구분합니까? 밥그릇을 계급 사이에 노나(나눠) 먹으면 진보고(도덕적이고) 혼자 먹으면 썩어빠진 守舊 反動이다, 이런 얘기잖아요』

여기서 얘기가 좀 비약한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이 구조조정을 하고 있잖아요? 이건 정확하게 弱肉强食으로 가는 겁니다. 지금 너무나 경제가 무너져 있으니까 약육강식이 아니면 해결책이 없는 거죠. 난 이걸 가지고 대통령을 비난할 생각도 없어요. 이것은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성과 비전을 가진 게 인간이라면, 어떻게 약육강식의 제도를 만들고 그것을 正義라고 말하는 시대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나오잖아요?』

그는 스스로 던진 질문에 또 스스로 대답한다.

『할 수 없죠, 그런 갈등 속에 살 수밖에 없지요. 도대체 약육강식이 아니면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나는 구석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영원한 문제가 약육강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놈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어요.

볼셰비키 혁명? 해결 못했어! 프랑스 혁명? 동학란? 다 해결 못했어! 모든 혁명은 약육강식을 때려부수기 위해서 시작한 거 잖아요. 또 수많은 민란! 결국 다 이걸 못 때려 부셨어요. 볼셰비키 혁명조차도 오히려 약육강식을 강화시켰어요. 이걸 해결할 길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덕 云云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종교도 무력한가요?

『우리 시대의 代案이 종교와 교육이잖아요. 종교와 교육의 힘으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는 건 그럴싸한 얘기죠. 그러나 그런 것들은 현실적으로 참 무력하고 타락해 있죠. 참 답답하죠』

―문학은 이런 때 뭘 합니까?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떻게 문학이 인간을 구원합니까. 아니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을 구원해? 난 문학이 구원한 인간은 한 놈도 본 적이 없어! 하하….

문학이 무슨 至純하고 至高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럼 지금 金薰씨는 왜 글을 써요?

『난 훈련이 그렇게 된 놈입니다.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그냥 쓰는 거지요. 습관적이라고 할까, 팔자라고 할까. 내가 어렸을 때 육사 갔으면 군인 됐을 거 아닙니까?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쓴 글이 어떻게 되기를 바래요?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감동을 받고, 자기 생각을 살찌우거나 고치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나요?

『그렇지는 않구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 쓴다는 것이 옳은 대답입니다』

―金薰씨의 글을 읽고 독자들이 同感과 異見을 표현해서 그 반응이 커져야 좋은 거 아닌가요?

『그거야 그렇죠. 사실 저를 비판하는 사람도 많아요. 수사학과 대책 없는 허무주의에 대해서 나를 비판하면서, 그것이 나의 한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金薰씨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은 다음 말로 확인된다.

『그런데, 그런 말이 다 맞아요. 그게 나의 한계예요. 한계가 거기만 있는 게 아니고 단어 하나 글 한 줄이 다 나의 한계인 거요. 나는 그 사람들이 말하는 한계보다 더 많은 수백만 개의 한계를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한두 가지만 지적하는 건 별 도움이 안 돼요』

작년엔 칼, 올해는 樂器

얘기를 하다 보니 저녁시간이 넘었다. 배가 고파 잠시 인터뷰를 멈추고 식당으로 나가려다가 언뜻 싱크대 밑 책장을 보니 대학 교과서 같은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한국음악통사, 중국고대음악사, 국악총론, 고려음악사연구, 한국고대음악사연구, 한국불교음악연구…. 그가 난중일기를 보고 「칼의 노래」를 썼듯이, 음악사를 줄줄이 꿰고 나서 또 무슨 일을 저지를 모양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작년 겨울에는 아산 현충사에 가서 충무공이 쓰던 칼만 들여다봤거든요. 올해는 악기만 보고 있어요』

우리는 집필실을 나와 일산 4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대지 70평에 건평 50평이라고 했다. 2층 집이었는데, 웬 집이 이렇게 좋으냐고 했더니 일산이 처음 개발될 때 산 집이라면서 지금 같으면 못 살 것이라고 했다. 이 집이 그의 全 재산이라고 했다.

아래층에 있는 그의 서재는 온갖 책들로 4면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중간에 서가를 한 개 더 놓고 책을 채워 놓았다. 모든 책들이 반듯반듯하게 서 있었다. 누워 있는 책은 없었다. 이걸로 그의 깔끔한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그에게 무슨 질문을 하면 그는 습관적으로 튄다. 부처님처럼 말을 부수느라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는 반듯한 질문에 반듯하게 답변하지 않고 곧잘 비뚤어진 대답을 한다. 받아치고, 비뚤게 나가고, 막말로 내던지고….

그런데 서재를 보니 깔끔하고 꼿꼿하다. 이것을 보면 그는 허무주의의 옷을 입고 표정을 훔친 연극배우이지, 허무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그러기엔 그의 생각의 틀이 너무 튼튼하다.

그의 집은 金大中 대통령이 살다가 팔아버린 집과 이웃해 있었다. 그의 집을 나서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가면서, 그는 자기 집 개 자랑을 했다.

『DJ가 당선자 시절 여기 살 때 진돗개를 키웠는데, 그 놈도 출세해서 지금 청와대 가서 살지요. 우리도 진돗개를 키웠거든. 근데 하루는 아침에 내가 개 산보를 시키다가 보니까 DJ네 개도 산보를 나왔어요. 내가 우리 개를 놓아 줬더니 그냥 달려가서 DJ네 개랑 한판 붙더군. 야, 우리 개가 이기는 거야! 우리 개가 그 놈을 막 물더라구. 개라도 이기니까 기분 좋더군!

그런데 그 집 개 산보를 시키던 경호원들이 우리 개를 몽둥이로 막 때리잖아. 내가 이렇게 보다가 막 쫓아가서 따졌지. 「여보쇼, 왜 개싸움에 사람이 개입하는 거요!」 그러고 우리 개를 끌고 왔지』

우리는 근처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흔한 탕수육과 고량주를 시켜 놓고 얘기를 계속했다.

―아버지(金光洲)에 대한 추억은?

『그 분은 金九 선생 밑에 있던 청년이었어요. 아버지는 上海에 가서 南京醫大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金九 선생 밑으로 들어가셨지요. 중국말을 잘해서 金九 선생을 위해 정보번역을 했어요.

해방이 되고 金九 선생과 같이 들어왔거든요. 아버지는 그 분 밑에서 나라 만들기에 동참하실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분이 安斗熙 총에 맞아 돌아가시니까, 아버지 앞길도 막힌 거죠. 그때 그 분 밑에 있던 수많은 청년들이 좌절했는데, 아버지도 그 중의 하나였어요』

소설가 아버지한테서 文章 수업

그런 그의 선친이 어떻게 소설가로 변신했을까?

『그 후에 아버지가 「비호」, 「정협지」 같은 무협소설을 많이 쓰셨지요. 그분(아버지)이 上海에서도 문학수업을 꾸준히 하셨다는 겁니다. 혼자서 공부하셨대요. 동아일보에 「비호」를 연재하셨지요』

―그럼 형편이 괜찮았겠군요?

『아이, 거지였죠. 정말 가난하게 살았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도 아버지가 연재소설을 쓰셨는데, 우리 어머니 말에 따르면 고료라는 게 없었고, 1년간 연재소설을 쓰면 신문사 사장이 쌀 한 가마를 보냈대요. 리어카에다 쌀가마를 싣고 왔는데, 쌀가마에는 사장 명함이 꽂혀 있었대요』

―그래 온 식구가 어떻게 살았어요?

『어떻게 산지 모르지요. 기적같이 살았어요. 지금도 굶은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평생 무협소설을 쓰셨는데, 그래도 그걸로 우리가 겨우 먹고 살았어요』

―아버지 글을 많이 읽었겠네요.

『그럼요. 무협지 대필도 했는데요. 아버지가 암에 걸려 5년을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우리는 아버지의 무협지를 팔지 않으면 굶어야 할 입장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누워서 소설을 불러 주시는 거죠. 그럼 난 받아쓰는 거요. 그때 동아일보에 연재할 땐데, 문화부 기자가 집에 와서 기다렸다가 원고를 받아갔어요. 내가 받아 쓴 걸 읽어 드리면, 「거기 점 찍어. 거기 줄 바꿔」 이러셨지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어요. 그때 나한텐 문장수업이 좀 됐을 겁니다』

오늘 그가 주목받는 소설가가 된 건 다 내력이 있는 일이다.

―지금도 아버지 소설 인세를 좀 받지 않아요?

『아니죠, 그땐 판권이 없었어요. 출판사에 다 그냥 팔아버렸어요』

그는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했는데 거기에도 사연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공립학교를 아주 싫어하셨어요. 金九 선생 밑에서 있다가 그분이 암살당하니까, 李承晩 治下에서 자식을 官學에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한국에 돌아오셔서 의사도 하실 수 있었는데, 스승을 죽인 者 밑에서 그런 것도 도저히 못하겠다고 생각하셨지요. 그런 절망감 같은 걸 가지고 사셨지요.

金九 선생 묘지가 효창공원에 있잖아요. 3·1절이 되면, 아버지는 4박5일쯤 집에 안 들어오고 친구분들하고 金九 선생 묘지에 가서 술을 드시는 겁니다.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면서. 당시 그 청년들한테 金九 선생은 神과 같았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무슨 활동을 했어요?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지요.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죠』

―고대 영문과로 진학하셨는데.

『처음엔 政外科로 진학했지요(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英詩를 읽으며 영문과로 轉科할 준비를 한 거지요.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나는 영문과 2학년으로 轉科했어요.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거든요. 군대에서 3년 있다가 제대해 보니까, 내 여동생이 또 고대 영문과에 들어왔는데, 복학을 하면 한 학년이 되게 생겼어요.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완전히 망했어요. 돈을 닥닥 긁어 보니까 한 사람 등록금밖에 안 돼요. 그래서 그 돈을 여동생한테 줬어요. 「내가 보니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 이 돈을 가지고 대학에 다녀라」 이러면서. 나는 내가 알아서 벌어먹고 살겠다고 그때 2학년을 마치고 대학을 중퇴한 거죠』

고대 영문과 2학년으로 전과해서 그는 부인(李燕和·54)을 만났다. 2년 뒤에 국문과에 입학한 부인과 동급생이 됐던 것이다.

부인에게 물었다.

―학교를 그만둔 게 참 안타까운데요. 그때 정말 형편이 그렇게 어렵던가요.

『돈보다도 잘난 척하면서 그만뒀지요. 더 이상 배울 거 없다면서 그만뒀으니까요. 정말 대학을 중퇴하고도 시험치는 데마다 다 붙었어요. 한국일보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구요, 두 달 동안 공부해서 영어 교사 자격증도 따냈고, 또 임용고사에도 전국 2등으로 합격했어요』

그들은 1974년에 결혼했다. 또 부인에게 묻는다.

―졸업장 없이 살아야 하는 데 대해 불안감은 없었습니까?

『얼마든지 졸업장 없이 사는 걸 보여 주마 해서 그걸 믿었지요』

이번엔 金薰씨에게 질문을 던진다.

―부인을 어떻게 만났습니까?

『그때 여자들이 나한테 막 몰려왔는데 우리 마누라가 그 중에 가장 먼저 달려온 여자지요』

잘난 척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대학을 중퇴하고 한국일보는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그때 한국일보만 학력 제한이 없었어요. 당시 張基榮 사장님이 고졸이었거든요. 그런데 시험쳐서 들어가 보니 나만 고졸이지 다 대졸이었어요.

張基榮 사장님 아니었으면 난 한국일보에 못 들어갔을 거예요. 마지막 면접을 하는데 그 분이 「왜 넌 학교를 못 나왔냐」 그러더라구요. 「돈이 없어서 못 나왔습니다」 그랬죠. 「넌 뭐하러 신문사에 올랴고 하느냐」고 하시더라구요. 「저는 특별한 뜻은 없구 제대를 했는데 먹구 살 게 없어서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한국일보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왔습니다. 뽑아 주시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랬어요.

그러니까 張사장님이 내 얼굴을 보더니 한심한지 편집국장을 이렇게 보며, 「야, 이런 애는 어떻게 해야 되냐」 이러더라구, 하하…. 그러시더니 나를 찬찬히 보고 나서 「너는 이 자식아 目子(목자, 눈)가 불량해서 기자는 할 수 있겠다. 에라 들어와라!」 이러시더라구』

그러나 그는 한국일보에 재직중에도 문제가 많았다.

『한국일보를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다니면서 몇 번 그만뒀다가 다시 들어갔지요』

―그때마다 이유가 뭐였어요?

『상급자와의 不和(불화)였죠』

「더럽고 지겨웠던」 1980년대

얘기가 1980년으로 돌아갔다.

『이런 얘기를 다 써주세요. 그때 많은 기자들이 언론자유운동하다 감방 갔잖아요. 나는 그때 全斗煥 대통령 찬양하는 글을 나 혼자 다 썼어요. 많은 기자들은 잘려나갔지만, 나는 살아 남았어요.

내가 그때 7년차 기자였는데 「니가 글 잘 쓰는 놈이니까 다 써라」 해서 「좋다 내가 다 쓴다」 한 거죠. 그때 회사 분위기가 어땠느냐 하면, 참 기가 막혔어요. 내가 원고를 쓰면 아무도 데스크를 안 보는 거요. 내 위에 차장, 부장, 부국장, 국장이 데스크를 봐야 하는데, 「나는 모른다」하고 다 술 마시러 가서 데스크를 봐 줄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걸 金薰 혼자 한 겁니다. 그래서 나 혼자 원고를 공장(공무국)에 갖다 줘서, 토씨 하나 안 고치고 그대로 나왔어요. 그래서 그분들은 지금까지 죄가 없는 거지요.

그 시대엔 내가 그걸 안 하면 누군가가 해야 됐어요. 어느 신문사든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조선, 중앙, 동아… 뭐 다 했어요. 나는 내 손목으로 그 짓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내 죄는 피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좀 받았겠군요.

『참 간단히 말 할 수 없어요. …나는 1989년 12월31일 신문사를 때려치우고 나왔어요. 80년대가 하도 더럽고 지겨워 가지고 80년대가 끝나는 날 나와버렸어요. 내일부터 깨끗한 90년대가 된다는데, 이런 언론계에서 나가서, 할 일 없으면 그냥 굶어 죽자, 하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90년부터 2년 동안 실업자로 살았지요』

―부인은 사표내라고 하시던가요?

『내가 마누라한테 말했어요. 내가 더러운 80년대에 이 지랄하고 살았는데 90년대부터 하루를 살아도 깨끗하게 살고 싶다고 했더니, 마누라가 울면서 그냥 나오라고 하더라구요』

―1981년 봄 언론자유 주장을 펴다가 감방에 갔던 기자들이 대전교도소에서 풀려나올 때, 金薰씨가 거기 오셨던데.

『맞아요, 그날 참 추웠어요. 그날 나오는 사람들을 붙들고 막 울었어요. 너무 좋고 슬퍼서요』

나는 그를 한참 쳐다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살 대책이 있었나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쌀도 없었어요. 거리를 막 헤맸어요』

―친구나 상사들이 말리지 않던가요?

『그냥 내버려뒀어요. 왜냐하면 내가 그 전에 너무나 여러 번 회사를 그만 뒀다 들어왔다 했기 때문에, 「이 자식 또 지랄이다. 정말 도리가 없는 놈이다」 이렇게 생각했겠죠』

―신문사를 들락거릴 때 선배들이 뭐라던가요?

『그땐 순정·낭만의 시대였어요. 내가 나가서 놀고 있으니까 선배들이, 「너 왜 그러니?」 그러면 내가 아무 말 안 하지. 그럼 이래, 「할 말 있니? 그럼 들어와서 해, 이 자식아!」 그럼 난 또 들어갔어요』

―그래 그 2년 동안을 어떻게 살았어요?

『술 먹고, 여행 다니고, 글 쓰고…, 浪人생활한 거죠』

―글은 무슨 글?

『돈도 안 되는 잡문이었어요. 그때 「풍경과 상처」란 에세이를 중앙일보에서 나오던 「월간미술」에 썼어요』

「풍경과 상처」는 1994년에 문학동네에서 책으로 나왔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살았어요?

『돈이 전혀 없었지요. 마누라가 금반지 나부랭이 팔아서 살았는지, 나는 잘 몰라. 그때 아이들한테 돈이 막 들어갈 땐데, 거의 극빈자로 살았어요. 불광동 산꼭대기 조그만 적산가옥에서 살았었지요』

辭表 20번, 그러나 『내가 옳았다』

우리는 이튿날 여의도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그는 역시 스님 차림이었다. 검정색 누비 덧옷을 걸치고 스님들이 신는 털신을 신고 나타났다. 점심 때 누구랑 반주라도 했는지 얼굴에 복사꽃이 엷게 피었다.

그는 1973년부터 2000년까지 27년간 기자생활을 했는데, 그간 직장을 여러 번 옮겼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일보(1973, 기자)→낭인(1990)→TV저널(1991,편집국장)→시사저널(1994,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국민일보(1998, 편집국 부국장, 출판국장, 편집위원)→한국일보(1999, 편집위원)→시사저널(2000, 편집국장, 이사)

한 직장에 있으면서도 들어왔다 나갔다 한 일이 적지 않았으므로, 자세한 것은 자기도 모르고 부인이 안다고 했다.

―그럼 사표는 몇 번이나 썼습니까?

『한 20번 쓴 거 같아요』

―좀 진득하게 참고 있지, 왜 그렇게 자주 사표를 썼어요?

『상사와의 불화, 하급자와의 불화 때문이었지요. 내가 경찰기자였을 때는 캡(경찰기자를 지휘하는 기자)과의 불화, 차장 때는 부장과의 불화, 부장 때는 국장과의 불화, 또 국장 때는 하급자와의 불화』

―무슨 불화가 그렇게 많았어요. 남들은 다 참는데…. 혹시 나한테 문제가 있구나 하고 반성한 적 있습니까?

『전 반성한 적 없어요. 지금도 전 옳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이 다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뭘 놓고 그렇게 불화가 많았습니까?

『원칙에 대한 문제였지요. 내 성품이 모자라서 그랬지요. 전 견딜 수 없는 건 견디지 못해요! 전 절대 안 견디지요. 그냥 끝내버려요』

―그럼 또 앞뒤가 안 맞네. 1980년도엔 왜 끝내버리지 않고 찬양하는 글을 썼을까….

『잘못된 거죠』

―그럼 반성하나요?

『반성한다고 말해서 용서되는 것도 아녜요. 제가 저질른 겁니다. 그래서 너무 수치스러워서 1989년 연말에 회사를 그만 둔 겁니다. 내가 너무 더러워서…, 이걸로 속죄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전 어쨌든 투항한 거 아닙니까? 용감한 사람들은 저항하고 감방으로 갔고, 나 같은 놈은 투항하고 직장에 있고…』

―신문사 그만두고 2년 동안 떠돌다가…, 무슨 일이 생겼어요?

『「TV저널」이란 잡지가 생기게 됐는데, 거기 가서 편집국장으로 창간 작업을 했지요』

―거긴 깨끗한 데였나요?

『쌀이 없어서 갔어요. 쌀이 없는데 어떻게 해요? 뒤주에 쌀이 없으면 이데올로기를 유지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崔元榮 회장이 오라고 했어요. 처음엔 그 잡지가 엄청 잘됐어요. 그런데 그게 잘 되니까 몇 달 후에 유사한 잡지가 다섯 개나 나와서 한꺼번에 여섯 개가 다 망했지요』

그는 「TV저널」이 망하자 최원영 회장이 함께 경영하던 주간지 「시사저널」로 옮겨 그곳에서 5년간을 일했다.

―거기서 만족한 생활을 했던가요?

『참 좋았어요. 부수도 많이 나갔고. 전 또 봉급을 받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이렇게 봉급을 많이 주는 회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이 들어오니까 금방 살림 형편이 피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언론사 대부분 그만큼은 줬어요. 그러나 거기선 제가 조직장으로 있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뭐가 힘들던가요?

『내가 편집국장을 한다니까 마누라가 말리더라구요. 「당신은 남의 윗자리에 가면 안 되는 사람이다. 당신 일이나 차분하게 하는 게 낫지, 그런 거 안 맞는다」고 그래요. 하여튼 「시사저널」 편집국장하면서 여러 번 문제가 터졌지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과 기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이 너무 많이 달랐어요. 저는 월급을 능력에 따라 차등으로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젊은 기자들은, 이런 나의 뜻을 자본가의 편에 서서 노동자를 박해하는 反시대적인 거라고 생각한 거죠. 나는 그때 젊은이들이 年功序列(연공서열)을 바라는 것에 절망했어요. 젊은이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연공서열을 때려부수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기자조합과 갈등이 많았지요』

―그 좋은 데서 좀더 참고 있지….

『지금 의료보험 통합 얘기를 하잖아요. 이것을 언론사들이 정책의 선택과 조정의 문제로 얘기하지 않고 善과 惡의 문제로 얘기하잖아요. 전 이런 야만성을 견딜 수 없는 거요! 그러니까 언론사들이 어느 한 편을 들어서 「내 쪽은 좋은 놈, 저 쪽은 죽일 놈」 하고 있잖아요. 선택과 조정의 문제를 선악과 도덕·부도덕의 문제로 바꿔버리는 겁니다. 어느 언론사고 지금 다 이러고 있어요. 물론 시사저널도 그랬어요. 이게 얼마나 낙후되고 야만적인 겁니까!』

그는 여기서 열변을 토했다.

『이런 문제가 우리 생애에 쌓이고 쌓인 겁니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도 다 이런 겁니다. 저는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전 현실적으로 언론인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로선 참 견딜 수 없는 것이었어요』

―최근에 있었던 정부와 언론과의 갈등, 또 언론사 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언론사가 탈세한 건 사실이에요. 탈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언론이 권력화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거야 벌받아 마땅한 거죠. 그런데 정부는 국세청을 동원해서 언론의 판도를 바꾸려고 한 거죠. 이건 양쪽 다 부인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문제는 언론의 자유와도 관련이 없는 거요. 조세正義와도 관련이 없는 거요. 두 권력 집단의 권력 투쟁에 불과한 거요. 권력화된 언론과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소수 집권당 정부 사이의 권력투쟁이라구요!』

權·言 갈등, 정부의 慘敗로 끝나

― 판결이 났다고 봅니까?

『났지요. 金大中 대통령은 이런 생각을 했겠지요. 「金泳三 대통령이 하나회를 없애고 군인들을 감옥에 넣는 권한을 과시한 것처럼 나도 그 거대한 朝·中·東의 사장들을 감옥에 보내겠다」고. 그러나 이건 朝·中·東의 사장들을 잠시 감옥에 보냈다 풀어줬다는 개인적 만족감을 과시한 것 이외에는, 언론개혁에 기여한 게 전혀 없는 겁니다.

만약 정부의 말대로 조세正義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언론사 社主들을 구속시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돈을 거둬들일 수 있었을 겁니다.

또 이번에 사장이 구속되지 않은 언론사 가운데 탈세규모가 어마어마한 곳도 많았는데, 왜 거긴 고발 안 한 겁니까? 그러니까 국민은 믿을 수가 없는 거죠. 고발 안 한 건 증명이 필요 없는 명백한 사실이잖아요? 또 그 신문사들이 親政府의 입장에서 보도한 것도 확실한 사실이잖아요? 정부는 이 사이에 因果관계가 없다고 하는데, 국민이 이걸 믿지를 않잖아요. 그러니까 이 게임은 정부의 慘敗로 명백히 끝난 겁니다』

그는 시사저널을 그만두고 국민일보로 가서 부국장(특집부), 출판국장으로 1년 넘게 일했다.

『집에서 6개월쯤 놀고 있는데 一面識도 없는 趙希埈 회장이 비서를 보내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그때도 또 쌀이 없어서 취직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쌀이 없어봐야 알아요. 있을 땐 그걸 모르지요. 거기 가서 간지(間紙) 만드는 일과 단행본 만드는 일을 했어요』

―거기선 왜 또 나왔어요.

『역시 상사와의 불화지요』

―아니 쌀이 없어서 들어가면 쌀이 많이 쌓일 때까지 참아야지 자꾸 튀어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참 갈등이 많았지요. 나의 평생의 話頭는 쌀이었어요, 쌀! 전에 내가 인사동에 있는데 마누라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집에 돈이 5만원밖에 없다는 겁니다. 쌀 살 돈이 없으니 돈 좀 구해 오라는 말 같았어요. 내가 마누라한테 그 돈 가지고 인사동으로 오라고 했어요. 마누라가 인사동으로 나왔어요. 나는 마누라하고 그 돈 가지고 술 다 먹어버렸어요』

―저런, 또 굶을라고!

『그거 술 먹어도 굶어 죽지 않는다는 걸 마누라한테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때 안 죽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살았잖아요』

―이젠 쌀에서 벗어났지요? 재산이 많을 텐데.

『우리 집밖에 없어요. 그게 4억쯤 될 거요』

―동인문학상 상금으로 5000만원이나 받았잖아요.

『빚 갚았지요. 지난 2년간 또 직장 없이 놀았잖아요』

―또 놀았단 말요? 정말 골치군!

그는 자기가 대책 없는 골칫덩어리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골치지요!』

―국민일보에서만도 편집국 부국장, 출판국장, 편집위원, 이렇게 세 번 자리를 옮겼는데.

『하여튼 나는 가는 곳마다 엄청난 직함의 변동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다 상사와의 불화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조희준 회장이 멋모르고 불러왔다가 후회했겠네!

『후회했죠. 그러나 많이는 안 했을 거요. 왜냐하면 바로 나와 줬으니까』

―아니 이제 나이도 들고 했으니 웬만하면 참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그러나 그의 대답은 태연하다.

『점점 살기가 좋아지니까 뭐 참을 필요도 없어졌어요. 아이들도 다 커서 돈 들어갈 곳도 없어졌고』

그의 일산 집에서는 부인과 딸(지연· 26) 아들(지강·大4·23)이 함께 살고 있다.

―자녀들이 아버지처럼 살면 어떻겠어요?

『그 애들은 아버지처럼 살 수가 없을 거예요. 나만큼 자유에 대한 열망이 없어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가정제도, 교육제도, 입시제도에 의해서 짐승처럼 자란 놈들입니다. 그 애들이 정말로 기성세대나 디지털 문명에 저항하고 나와서 뛰어난 인간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여 줄 수 있을지 지극히 회의를 가지고 있어요』

―金薰씨 얘기 들으면 재미있기도 하지만 걱정도 되네요. 현실생활에서 실패한 李箱 생각도 나고.

『전 과히 실패하지 않았어요. 집도 있고 애들 둘 다 대학 보내고…. 내가 고등학교 나와서 우리 큰딸 대학원까지 보냈으면 난 특별히 성공한 거요. 큰딸은 지금 영화사에 다녀요.

내가 성질이 지랄 같아서 1년에 몇 번씩 판을 엎는 놈이 심지어 언론사 국장까지 했고, 또 뒤집어엎고 나와서도 동인문학상까지 받았으니, 이런 거 생각하면 난 찬란하게 성공한 거죠!』

―친구들은 金薰씨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뭐라고 그래요?

『마누라나 친구들이 울면서 이제 고만 좀 하라고 그러죠. 내가 하도 지랄 같아서 내 친구들이 다 떨어져 나갔어요. 요즘 나랑 노는 사람들은 10살이나 15살 아래 후배들이에요. 내 친구들은 나에 대한 지겨움 때문에 다 떨어져 나가서 하나도 없어요』

―지금 「놈」 하고 「새끼」가 입에 붙었는데, 습관 때문인가요?

『세상 놈들이 다 쓰레기 같아서 그렇게 됐어요. 저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 좋은 사람을 보면 깍듯이 하지요』

내가 인터뷰를 하면서 보니까 그가 깍듯이 위해 바치는 사람은, 忠武公, 金九 선생, 張基榮씨, 張明秀 사장, 그리고 그의 선친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얘기는 계속된다.

―한국일보를 떠난 지 10년 만에 다시 한국일보 편집위원으로 갔으니(1999), 이건 또 어떻게 된 겁니까?

『국민일보에 다닐 땐데, 張明秀 선배가 한국일보 사장이 됐어요. 그분은 내가 문화부 기자 시절 문화부장이었어요. 그런데 그분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그분이 대뜸 「야, 와!」 그러더라구요. 「예?」 그랬더니 「한국일보로 와!」 그래요.

그 전화 받고 20분 만에 내 몸을 갖고 그분한테 가서 현물을 보여 주고, 「한국일보서 일하겠습니다」 그러고, 그 다음날부터 한국일보로 가서 근무했어요. 거기서 「자전거 여행」이란 글을 썼어요. 1주일에 한 번씩 1년간 연재했지요. 그게 「그 마음의 풍경, 자전거 여행」이란 책이 된 거죠』

―그렇게 선배가 불러서 가셨으면 잘좀 하시고 더 있을 것이지, 왜 또 1년 만에 뛰쳐나왔어요.

『조직사회가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걸 너무 싫어하더라구요. 한 10년간 나갔다가 다시 오니까 내가 완전히 아웃사이더가 됐더라구요』

그의 얘기는 한 단계 더 발전했다. 그는 어느 특정 조직이 아닌 세상의 조직에 대해 칼을 휘둘렀다.

『조직이란 개들 패거리와 같아요. 개를 길러 보세요. 우리 골목에 사는 개들은 서로 무지하게 친해요. 그러나 맞은 편 골목에 있는 개들은 만나면 다 물어죽일라고 해요. 지금 영호남이 싸우는 것도 개싸움하고 똑같아요. 다 동물수준이야! 인간으로 진화하지 못한 자들이 지금 저렇게 싸우고 있는 거요. 개들이 왜 그런지 아세요. 개들이 자기들 똥냄새와 다른 놈을 만나면 물어 뜯는 거라구요. 영호남 싸움도 이런 거 아닙니까?

한국인의 1차적인 근원정서가 난 이런 거라고 봐요. 이것을 뭐 향수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얘기하잖아요.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우리는 야만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보편주의와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지향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바보가 되고 마는 겁니다』

勞組가 資本 부수면 같이 망해

―개처럼 싸우고 있는 데도 세상은 자꾸 발전하는 데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도 엉뚱한 것이었지만 대답도 한참 뛰었다.

『사회 진보에 대한 열망은 노조에 있는 게 아니라 경영자한테 있는 것 같아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경쟁력을 강화해서 난국을 돌파하는 힘은 경영자한테 있어요』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희망이 있지요. 자본에 희망이 있어요. 자본이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데 희망이 있는 것이고, 자본이 작동 방식을 인간화하는 데 희망이 있는 것이지요. 노조가 자본을 때려부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구요! 노조가 자본을 때려부수면 노조도 같이 부서진다는 걸 IMF 이후 지난 몇 년간 배웠잖아요!』

―그러나 자본과 경영의 힘이 너무 커지면 안 되잖아요?

『글쎄 이 시대의 문제를 달리 어떻게 해결하겠어요. 자본의 리더십에 의해서 해결하기로 정한 거 아닙니까?』

―아니, 金薰씨가 신문사에 있을 때 노조에서 무슨 감투를 썼던 것 같은데.

『노조 홍보부장을 했지요』

―홍보부장을 지낸 사람의 입장에서도 같은 생각입니까?

『그땐 월급을 많이 올려달라고 했는데, 회사가 그런 역량이 없었어요. 노조가 잘못한 거지요. 왜냐하면 회사가 이윤이 없는데 돈을 달랬으니까』

―1년 후(2000)에 시사저널 편집국장 겸 이사로 다시 갔는데.

『거기서 다시 오라고 해서 갔지요. 가서 3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왜 또!

『내가 「한겨레 21」하고 인터뷰를 했는데, 그게 잘못됐다고 해서 나와버렸어요. 세상만사에 대해서, 지금 말하는 것처럼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말했어요. 나는 여성주의자가 아니고, 나는 당신네 편이 아니고, 나는 노동자의 편이 아니고, 나는 신문기자의 편이 아니고…. 그런 얘기를 했는데 세상이 들끓고, 나의 자격문제가 나오길래, 그 얘기가 나오고 10분 만에 나와버렸어요』

―그래도 이번만은 상사와의 불화가 아니네!

『상사와의 불화가 아니고 세상과의 불화지, 하하…』

―요즘 수입은? 좀 살 만하신가요?

『전혀 없어요』

―「칼의 노래」도 잘 팔리잖아요?

그는 백지에다 대차대조표를 그려 보이며 말했다.

『최근 1년 6개월 동안 무직으로 10원도 안 벌고 살았어요. 그 전에 퇴직금도 한푼 없었어요. 그동안 2000만원을 빚졌어요. 동인문학상 상금을 5000만원 받고, 상을 받으니까 책이 잘 팔려서 인세를 2000만원 받았어요. 그러니까 수입이 7000만원인데, 빚 2000만원을 갚으니까 5000만원이 남지요. 거기서 내가 1000만원어치 술 먹고 살림하는 데 쓰고 하니까 지금 한 1000만원쯤 남았어요』

―수입은?

『지금 한푼도 없어요』

―원고 청탁도 많이 들어올 텐데.

『잡지사에선 200자 원고지 한 장에 5000원씩 준대요. 신문사에선 칼럼 청탁이 들어왔는데 한 장에 1만원씩 준대요. 열 장 쓰면 10만원이죠. 그걸 쓰자면 하룻밤을 꼬박 새야 하는데…. 안 쓰겠다고 했어요』

―그럼 어떻게 살지요?

『돈 필요한 데가 점점 줄어들더라구요. 애들이 크니까. 큰딸은 지금 돈을 벌어서 나한테 매달 26일에 15만원씩 주거든요. 이중으로 이익이죠. 매달 가져가던 돈을 안 가져가니까 이익이고, 또 나한테 주니까 이익이고. 난 26일만 기다려요. 15만원은 나한테 엄청나게 큰돈이지요』

―忠武公에 대한 재해석이 「칼의 노래」로 나타났는데, 우리의 역사적 인물 가운데 그렇게 해석해 보고 싶은 인물은?

『安重根과 于勒을 한번 해 보고 싶어요. 안중근은 무기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사람이고, 우륵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완성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둘 다 남아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안중근의 작품은 이토(伊藤博文)의 몸에 박힌 총구멍인데 다 썩어 없어졌을 것이고, 우륵의 악기도 작품도 남아 있는 게 없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두 분의 생애에 대해 지금 공부하고 있어요』

『吟風弄月하며 살고 싶다』

그의 작은 집필실 책장에 꽂혀 있던 음악 책들이 떠올랐다.

―앞으로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吟風弄月하는 거요. 음풍농월하자면 우선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어야 해요. 한 달에 100만원만 있으면 음풍농월할 수 있어요.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요』

그는 꼭 金薰다운 꿈을 꾸고 있었다. 하긴 그는 지금도 음풍농월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당대의 현실에 대해 내뱉는 그의 소리를 들어오지 않았는가.

그는 꼭 무언가 큰 것을 남길 만한 작가가 가지고 있어야 할 만큼의 독특한 성격을 그의 독특한 그릇에 잘 담아 가지고 있다. 그는 머리가 명석하고, 부지런하고, 오만하고, 꼼꼼하고, 성실하고, 지랄 같고, 못 참고, 잘 싸우고, 고집 세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멋을 부릴 줄 알고, 허무주의자인 척하고,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고, 어수룩한 것 같으면서 챙길 건 다 챙기고, 튼튼한 보수주의자고, 무책임하고…. 그래서 직장인이나 家長으로서는 썩 훌륭하지 않으나 작가로서는 썩 훌륭한 사람, 金薰. 그가 음풍농월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당대의 현실에 대해 내뱉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할 것만 같다. 그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테니까.

이번 주에 읽은 책 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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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밋빛 인생(정미경/민음사)
삶은 장미만큼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간간히 섞여있는 아포리즘 투의 어투로 화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한 남자와 그의 정부, 그의 아내, 그의 후배가 엮어내는 일상의 그림은, 마치 우리들의 것인냥 쓸쓸합니다.
2.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신경림/우리교육)
시인을 찾아서 1. 에 비해서 조잡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선정된 시인들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신경림의 취향이니까 어쩔 수 없다 하겠지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훑고 지나는 데에는 상업주의의 냄새마저 풍깁니다.
툭하면 들고 나오는 엘뤼아르나 사르트르도 식상하고, 신경림 나름의 자의적인 시해석도 불만입니다. 2탄은 권하지 않습니다.

어떤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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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온전하게 남아있는 자의 몫이다.가끔 그들의 얼굴이, 그들과의 대화가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라 가슴을 후빈다.
시간은, 아무 것도 지우지 못한다. 시간은 다만 덧칠할 뿐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욱 불행해 질 것이다. 그 어느 하나도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을테니까.

문신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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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불현듯 생겼습니다.

문신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거의 동시에 내 머리엔 내가 가져야 할 문신이 떠올랐습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는 최인훈의 소설이 있었지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깨와 겨드랑이 중간쯤에서 살갗을 비집고 고개를 쳐드는 날개,라기 보다는 비늘에 더 가까운.

…..화려하게 꾸민 옷 같은 몸을 가지고 있어요. 양어깨에는 용틀임하며 올라가는 용의 비늘들이 소용돌이치고 있고, 팔에는 인도의 윤회의 수레바퀴 같은 황금빛과 검은빛 색채의 동그라미가 타오르고 있으며, 등에는 온통 삶과 죽음을 지배하는 동양의 신들과 호랑이와 용과 꽃들이 만발해 있어요. 그는 그것을 ‘바디 수트’라고 불러요. 육체가 타오르는 옷이에요…..남자는 오늘이 자기 생일이래요. 그래서 자기 생일선물로 새 날개를 문신해 갖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자기 생일날 문신하러 오는 사람이 많아요. 자기가 자기에게 선물하는 것이지요. 운명을, 다시 태어남을, 새로운 재생의 힘에 넘치는 이미지를, 고통을 뚫고 피를 보고서 다시 가겠다는 선언과도 같을 때가 있어요…..나의 눈 양옆에는 세 방울씩 눈물이 박혀있다. 그것은 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문신 눈물이다. 코울러 티어즈라는 것이다. 담즙의 눈물이라는 문신이름이다…..
척추를 중심으로 등 한복판에 검은 빛살처럼 확 퍼져 있는 쥰꼬의 뱀비늘 문신이……

무릎에 국화꽃 문신을 한 쥰꼬…..

그들은 동반자의 표시로 왼쪽 복사뼈 위에 똑같은 까만 새 날개 문신을 나눠 갖고 있다……

김승희/ 백중사리/ 창작과 비평 1997 겨울호/

東洋 3國의 북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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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무용단 제74회 정기공연 (97.11.29 — 12.2)

東洋 3國의 북춤

0. 우연하게
생긴 공연티켓 덕분에 근사한 눈요기를 하고 난 다음에 생기는 욕심은, 맛난 음식을 먹고 난 후의 그것과 같습니다. “다음에 또….”

보다 효율적인 소비, 먹고 마시는 이상으로 삶의 활력을 주는 소비.
좌석은 물론이거니와 입석도 가득 들어찬 국립중앙극장은 무척 훈훈했습니다.1.중국
山西省 봉(실사 변에 받들 봉)州大鼓秦王点兵(진왕이 병사를 뽑다)라는 작품으로 시작된 중국의 북소리는 호두를 굴리다, 늙은 쥐가 결혼하네, 북,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다, 황소가 호랑이를 놀리다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색이 붉은 색임을 다시 한번 강조해 주는 듯한 붉은 큰북에서 울리는 소리는 거대한 중국대륙의 이미지, 바로 그것입니다. 잔 기교보다는 굵직한 선과 모습이 기운차게 느껴졌습니다.
무대가 열린 후 첫 작품인 秦王点兵의 멜로디는 무척 낯익은 것이었는데, 영화 황비홍의 주제가인 '男兒當自强'의 음률과 똑같더군요. 무대 뒤편에 커다랗게 서있는 (진시황릉에서 발견된) 대형조각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늙은 쥐 결혼하네 에서는 아주 조그만 북들을 두드려 생쥐가 도망가는 형상을 그럴싸하게 묘사하더군요, 그 외에도 개선가를 부르며 귀대하다 등등 전체적으로 좀 지루하다 싶은 감은 있지만 대륙의 커다란 모양새가 느껴지는 작품들이었습니다.

2. 일본
야고로 돈 북춤 공연단
우까레 라는 작품으로 시작한 일본의 북소리는 굉장히 집중력 있게 들려옵니다. 오고시, 오하라, 미노리, 大太鼓, 劍舞, 오히토 등등의 작품을 공연했습니다. 북들이 모여서 일체화된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소리들이 매스게임을 벌인다고나 할까요?
3국의 북 소리 중에서 가장 커다랗게 들리는 북소리가 일본의 북소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게다가 검의 형상을 한 북채를 들고서 사무라이 같은 자세로 큰북을 두드리곤 하는 모습은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도 전해주었습니다. 샤미센을 연주하며 중간중간 리듬을 잠시 끊어 가는 것도 매우 효과적인 연출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화려하진 않지만 의상 역시 깔끔한 느낌이었습니다.
관객의 박수를 유도하는 손짓이라든가 객석을 뚫고 등장하는 도입부 등이 야고로 돈 북춤의 전형이 거리축제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관객들의 호응도 무척 높았고 박수도 크게 나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북을 '울린다'는 소리를 가장 실감나게 들려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3. 한국
한국의 북소리는 호리호리한 미녀들의 장고춤으로 시작되었습니다만, 북보다는 춤에 더욱 초점이 맞추어진 듯 해서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낯익은 가락이었기 때문에 편안하긴 하더군요.
소고춤의 안채봉, 걸북춤의 인간문화재 박병천, 고성 오광대, 3북춤 등이 나왔습니다. 한, 중, 일 3국을 통틀어 무엇보다 갈채를 많이 받았던 작품은 역시 3북춤이네요.
30여명의 여성들과 10여명의 남성들 그리고 사물놀이패가 두드려 대는 북소리와 그들의 춤사위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장관을 이룹니다. 프랙탈 무늬 같은 현란한 정교함이 미의 극치를 만들어내며 관객을 환호하게 만들더군요.
그 외에도 북의 대합주, 문둥 북춤 등이 나왔습니다만, 한가지 불만스러운 것은
의상입니다. 너무도 현란한 색상들이어서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으니까요. 춤사위에 상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두었기 때문일까요? 더욱이 일본과 중국의 공연 팀이 북춤 전문 공연단임에 비해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에 원인이 있을런 지도 모르겠습니다.

4. 마지막의
대미는 역시 삼국의 북이 모두 나와서 하나의 가락에 맞춰지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각국의 향취를 지니고 있던 북들이 어떻게 그리 똑닮은 소리를 낼 수 있는지….어쩌면 그 모습이 보고 싶어 공연장을 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큰북의 원주는 삼국 공히 두사람 이상이 감싸안아야 할 만큼이며 높이는 가슴정도까지입니다. 작은북이나 중간 북의 크기도 삼국이 비슷하고요. 모든 사람들이 북을 하나씩 짊어지고 나와 무대를 가득 메웁니다.

둥둥둥둥둥…..

북소리가 사람의 심장소리를 닮았다고 하던가요?
이미 북소리는 제 가슴속에서 진동하며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둥둥둥둥둥……

바다가 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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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竹島. 대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잠을 자다가 음식을 먹 는다는 행태는 권태롭다.
허겁지겁 깨워 어딜가자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좋을만큼, 그러나 졸립다.

내 인연의 여러갈래 길.

버려야 할 특별한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자에게
바다는 너무 냉정한 거인이다.

스물 일곱.
그동안 몇몇의 바다를 다녔지만, 그의 미세한 숨결을 느끼며 그
가 정말로 살아있다고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잔잔히 바
라보고 있노라면 바다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쉼없
이 속삭이고 있었다. 삶과 죽음, 혁명과 투쟁, 평화, 행복, 사람
과 사랑, 하늘, 인생 …따위의 단어들을 내 가슴에 하나하나 펼
쳐보이며 하늘한 숨을 토해놓는 것이었다.

내게 있어 올여름의 바다는,
끈적한 욕망의 집착과
의지박약으로 덧칠된 군더더기같은 삶과
모든 인연의 줄을 끊기 위한
'버림'을 준비하는 聖所였다.

그런 하잘데 없는 쓰레기들을 버리려고 바다를 찾아가다니. 바
다는 삶과 같아서 내가 무엇을 버리던간에 동요하지 않는다. 그
것이 내겐 참으로 슬프게 다가왔다. 바다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일
까? 살아있다는 일이 내게만 버거운 것은 아닐지언정, 이런 상념
에 빠져드는 것도 아직 덜 ….결국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하고 말
았다. 외려 인연의 줄 하나가 더욱 튼튼하게 날 조여왔다.

환상을 보았음이다. 그때에.
뱃전에 서서 걸어다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만큼 일렁임에
익숙해 지는 그 때에, 난 구름 속에서 빠져나와 바다로 걸어 들
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보았다. 날 보며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다가 되었다.

충무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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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15:30
날은 무척
덥다.
달랑 옷가지 몇개만 든 배낭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다 버리고 오자.

7/31/16:30
What the hell! 왼쪽,새디스트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남자와 여자는 계속해서 서로를 괴롭히고 있고 오른쪽, 엄마 말을 듣지 않고 찡찡대는 꼬마녀석, 앞엔 엉덩이를 들이미는 입석의 아줌마. 아이들은 싫다.

7/31/20:00
길이 많이 막힌다.
느리다. 느림에 익숙하지 못하다. 느림에 익숙하지 못해 불안하다. 이것이 ‘현대’ 혹은 ‘문명’이라고 지칭되는 가속인가?

7/31/20:05
가만 생각해보니까,
내가 불안해 하는 이유는 느림에 익숙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지 못하는 데 있었다. 아니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이유. 아침 8시부터 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극적이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그런 한심한 이유로 이렇게 초조해하다니!

7/31/21:40
여기는 마산.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은 없다. 그 하나 뻘건 십자가. 일견하기에도 지옥!

7/31/22:10
마산 지나서 옥수. 여독이 쌓인다는 생각이 들만큼 피곤하다. 하지만 달은 참 밝다.

7/31/22:50
충무! 드디어.

7/31/24:50
짐을 푼다. 베란다에 서면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