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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불행과 가식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 SNS를 열심히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지금 깊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그들과 나의 관계가 서먹하거나 엉성한 것은 아니다. 유유상종,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고 있는 것일까?

트위터가 시작한 web 2.0의 시대에 나도 거의 모든 일상을 트위터에 공개하던 때가 있었다. 의식의 흐름을 자동 기술하는 것을 넘어서 알아듣기 쉽게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것이 기술적인 진화라고 의미를 두었다.

그러다가 SNS를 통해 프라이버시가 낱낱이 공개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더이상 SNS를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이미 올린 게시물을 삭제하고 계정을 탈퇴하고 비공개로 전환했다. 특히나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트위터는 여러 종류의 3rd party app에도 흔적이 남아서 구글링에서도 흔적이 지워지기까지는 거의 2년여가 걸렸다. 

하지만 업무 특성상 그 서비스들은 계속 들여다 봐야 했고 어쩔 수 없이 닫았던 계정을 다시 열고 또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내 사진과 내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고 내 생활을 올리지도 않았다. 새 SNS의 타임라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낯선 타인들이고 극히 일부만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SNS에서는 여전히 많은 글과 사진과 링크와 영상이 올라오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 좋은 일들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여행지를 방문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또 새로운 사람들과 친구를 맺는 일들 말이다.

심지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도 그것들을 넘기다 보면 어느 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a는 또 술 마시는 사진이네. 매번 카메라를 치켜들고 각자 손가락 브이를 그린 여러 사람의 얼굴들. b는 중국 사업을 확장하는 지 중국어 표기를 병행하기 시작했고 c는 또 신기한 간식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timeline이라고 부르는 그 행복의 조각들은 사실 많아봐야 그들의 시간을 모두 담고 있지도 않고 또 그 특징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인생의 절반의 절반의 절반 정도를 담고 있을 뿐이다.

삶은 그렇게 행복하기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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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이 달콤한 이유는 휴식할 수 없는 많은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이다. 단 음식을 계속 맛 본 혀는 단 맛에 둔화되고 어느 순간부터 더 많은 단 맛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니까 timeline이라는 단어 앞에는 really-extreme-short-happy와 같은 수식어가 숨어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객관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쓴 맛과 단 맛을 고루 표현하는 균형 감각을 지닌 사람들도 있지만 그 몇몇의 사람들이 타임라인을 지배하는 단맛을 희석시키지는 못한다. 맑은 물에 검정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검정 잉크에 맑은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의 차이와 비슷할 것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틱톡, 그리고 카톡까지.

새벽 6시에 깨어 낯선 사람들의 소식을 한시간이나 멍하니 들여다 봤다. a와 b와 c는 내가 그들을 이렇게라도 가끔씩 지켜보는 것을 전혀 모를 것이다. 우리는 생애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교류라고 할 수 없고 소통이라 할 수도 없고, 관심이라 할 수 없다. 관음증에 가깝다. 아니 그들을 지켜본다 해서 쾌감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볼 수도 없다.

그런데 사실 더 진짜 문제는 a와 b와 c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들과 더 친해지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그들의 (really-extreme-short-happy) timeline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들과 교류하고 교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만일 a가 먹은 술안주에 좋아요를 누르고, b의 중국어 표기에 하트 표시를 눌렀다 치자.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그는 나의 좋아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심지어 그의 소셜 네트워크에 연결된 사람이 많아서 좋아요가 100개 넘어갔다고 하자. 나의 좋아요는 그에게 제대로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SNS에서 좋아요를 주고 받는 것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고 심지어 전자의 경우 서로의 네트워크가 풍성하여 콘텐츠와 반응이 많아질 수록 점점 더 의미가 희미해진다. 모순적이게도 더 많은 좋아요는 점점 더 숫자에 가까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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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SNS의 본질이다.

사람들간의 흐릿하고 허약한 관계를 좋아요와 follow로 그럴 듯 하게 포장해 내보이는 것. 인스타그램이 대충 찍은 사진을 예쁘게 변환해주는 기능으로 성공한 것과 같다. 내가 더 많은 사람의 소식을 안다고 해서, 내 소식에 더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른다고 해서 인생이 풍요로워지지 않는다

이런 새소식의 무의미에 대해 소로우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신문에서도 기억할 만한 소식을 읽었다는 기억이 없다…어떤 집에 불이 났고, 어떤 배가 침몰했고, 어떤 기선이 폭발했고, 어떤 젖소가 서부 철도노선에서 기차에 차였으며, 어떤 미친 개가 죽었다는 소식은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읽을 필요가 없다… 원칙을 알고 있다면 무엇 하러 무수한 사례와 적용에 신경 쓰는가?”.

월든.헨리 데이빗 소로우

어떤 개가 죽은 소식이 별 가치가 없는 것처럼, a가 어떤 술을 마셨는지도 사실 별 가치가 없다. 소셜 네트워크라고 부르지만 개인과 개인은 관계라는 집합의 원소로 그 안에서 점점 더 고립되어 간다. 

한편 이 소셜 네트워크를 소셜 미디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미디어가 의사 표현이자 메시지이고 영향인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소셜 미디어는 매우 부정적이다.

어떤 개가 죽은 소식을 황망히 전달하는 황색 저널리즘의 무한 다단계같은 느낌.

그 옛날 스포츠 신문의 연예인들의 비밀 교제 이야기는 그 신문을 안 보면 그만이었지만 그 소식이 SNS에서 무수히 반복된다면 사실 피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스포츠 신문에서는 겨우 한 명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SNS에서는 그 수가 무한대로 늘어난다. social과 media는 아예 병립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닌지, 소셜 미디어는 무엇인가를 억지로 포장한 위장용 용어가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소통에는 눈 맞춤이 필요하다.

SNS에서 좋아요와 🙂 뒤에 숨은 눈물과 한숨, 무관심을 알아낼 방법이 없지만, 마주 앉아 있으면 그의 가짜 웃음을 알아 낼 수 있고 그가 굳이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아도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그런 면에서 늘 먼저 연락하고 만나러 찾아와주는 D 후배는 매우 놀라운 사람이고 존경할만 하다.

근래에 나는 모니터와 키보드 대신에 작은 노트와 만년필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속도는 훨씬 느리지만 글은 더 깊어져 마음에 든다.

관련 글  춘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실시간이어야 할 이유는 없고, 소통의 대상이 많아야 할 이유도 없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불행과 가식”의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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