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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역에서 너구리를 만나다

야근을 마친 시각이 아마 … 새벽 2시 40분쯤일 겁니다.
피곤한 기지개를 켜고 널부러진 서류들을 대강 정리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습니다.
밤 공기가 아주 상쾌해서 심호흡을 몇번 하고 나니 정신은 맑아졌습니다. 몸은 여전히 찌뿌둥한데 말이죠.
이런, 새벽 시간이라 택시는 커녕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온갖 자동차들로 가득했을 삼성역 사거리의 10차선 대로가 휑하니 검은 아스팔트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습니다.
‘흠, 조금 걸어가 볼까’
언제 올 지도 알 수 없는 택시를 마냥 기다리고 섰는 모양새가 영 어설퍼 보여 천천히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넓은 10차선 대로를 과감히 무단횡단, 낮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니 억눌린 일탈의 욕구가 해소되어 쾌감이 생깁니다.
불 밝힌 가로등의 숫자를 세며 모처럼 낭만적으로 걷고 있었는데 저만치 앞에 검고 통통한 물체가 눈에 띄였습니다. 얌전히 앉아있는 까만 고양이? 야행성 도둑 고양이 같았지만 낯선 길에서 누군가를 만난 반가움에 인사를 건넸지요.
“여어~ 뭐하는 거야”
녀석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거리가 5미터쯤으로 가까워지자 그 녀석은 자세를 낮추고 뒤뚱뒤뚱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정체를 알았지요.
그것은 너구리!
양재천에 너구리가 산다는 기사(양재천은 ‘너구리 천국’ 밤마다 10여마리 배회…)를 보기는 했는데 삼성역 입구에서 너구리를 만나리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지요.
뛰어 따라갈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제 머리에는 한순간 너무 많은 상념이 떠 올랐습니다.
길, 새벽, 달빛, 사람을 홀리는 일본 너구리, 롯데 월드, 양재천, 환경, 사람, 인연, 자연보호, 낯설고 궁금한 …
요정을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기묘한 어느 새벽의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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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역에서 너구리를 만나다”의 3개의 댓글

  1. 야~. Y! 가시더니, 새벽까지 일을 다하시네.
    삼성역이었다는 걸 못보고, '잠실역의 너구리 동상이 밤에 돌아다니다가 동이 트면 다시 동상인것처럼 하고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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