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서랍. 강신애

오래된 서랍. 강신애


나는 맨 아래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다
더이상 보탤 추억도 사랑도 없이
내 생의 중세가 조용히 청동녹 슬어가는


긴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서랍을 연다
노끈으로 묶어둔 편지뭉치, 유원지에서 공기총 쏘아맞춘
신랑 각시 인형, 건넨 이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코 깨진 돌거북, 몇 권의 쓰다 만 일기장들……


현(絃)처럼 팽팽히 드리운 추억이
느닷없는 햇살에 놀라 튕겨나온다


실로 이런 사태를 나는 두려워한다


누렇게 바랜 편지봉투 이름 석 자가
그 위에 나방 분가루같이 살포시 얹힌 먼지가
먹이 앞에 난폭해지는 숫사자처럼
사정없이 살을 잡아채고, 순식간에 마음을
텅 비게 하는 때가 있다


겁 많은 짐승처럼 감각을 추스르며
나는 가만히 서랍을 닫는다


통증을 누르고 앉은 나머지 서랍처럼
내 삶 수시로 열어보고 어지럽혀왔지만
낡은 오동나무 책상 맨 아래 잘 정돈해둔 추억
포도주처럼 익어가길 얼마나 바라왔던가


닫힌 서랍을 나는 오래오래 바라본다
어떤 숨결이 배어나올 때까지

오래된 서랍에 들어있지만 추억은 언제나 마음을 뒤흔들어 나를 혼미하게 만든다. 어지러운 삶이 추억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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